섬은 아름답다. 다만 그것 뿐이라서 슬플 뿐이다. 오늘도 정원을 가꾸고 온실을 돌보고 숲을 산책하며 열매를 모으고 물가에서 마실 물을 길어왔다. 그리고 아이와 요정, 동물들과 함께 폭신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불을 지펴놓은 채로 내리는 바람에 철길을 따라 혼자서 내달리는 증기기관차를 붙잡아서 차고까지 몰고가며 철길 위로 놓인 전깃줄이 아직 팽팽한가 살펴보기도 했다. 그렇게 섬은 빛났다. 다만 그것 뿐이었다. 계속 그 뿐이라고 이야기하며 차고에 도착했을 즈음에 나는 피곤해져서 잠시 근처 풀밭에 누웠어. 그리고 예전 기억이 한데 뒤섞인 악몽을 꾸었다. 이 섬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사람들이 하유라는 섬나라로 갈 때, 나도 그 안에 있었지만 의외로 사람들과 같이 살기 싫었던 나머지, 나만 통나무 배를 타고..
귀여운 자동인형 소년. 온실 속에 살아요. 세상을 잘 몰라요. 세상이 무서워요. 지쳐서 쓰러지면 여우가 폭신해. 목 마를 때면 샘이 눈 앞에. 우울하지만 반짝이는 세상 속 왕자님같은 인형은 어느새 세상 밖으로 끄집혀졌어요. 보통의 못생긴 아이로 현실을 살면 이렇게 형편없어지던가요. 조금 더 걸어가면 죽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오늘도 현실 속에서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어떤 온실 속 귀여운 자동인형 소년이 있었어요. 죽어서 다시 자신의 온실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게 행복.
푸른 요정은 오늘도 우울해한다. 창가에 비치는 바다가 너무 예뻐. 바다는 푸르고 아름다워 하다가 나를 바라보고는 서로를 인형이라고 생각하고서 몸짓을 지어주고 서로 귀여운 옷도 입혀주며 놀면 좋을까 하길래 인형을 다루듯이 그 아이를 움직여 나름대로 귀여운 포즈를 잡아주고 볼을 주물거렸더니 싫은 소리를 내며 저리 가라고 하는 푸른 요정의 칭얼거림을 들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왜 이러고 있는거지 생각을 하면서 그저 무료하게, 푸른 요정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갸웃거리며 나를 보길래 쓰다듬어 주었고 눈을 살포시 감으며 미소짓는 귀여운 모습을 봤는데 왠지 덧없었다. 그런 놀이에 어울려주는 것보다는 일단 바깥에 나가보는 것이 낫겠지. 옷자락을 잡으며 싫은 표정 짓는 푸른 요정을 뿌리치고 바깥으로 나왔나..
말해줘요. 나는 지금 잠들어 있죠? 어딘가에 잠들어서 무언가에 연결되어 환상이 계속 넣어지는 채로 잠들어 있는게 분명해요. 포트넘 가설이었던가요, 통 속의 뇌보다는 온전한 모습으로 어딘가 붙잡혀서 연결되어서는 환상이 불어넣어지는 것 같은데요. 하나의 허상이 있고 그 허상을 붙잡아서 그것을 어떤 실체로 알아버리는 순간, 시뮬라크르는 시뮬라시옹으로. 결국 가짜잖아요. 이 모든 아름다움 추악함 불평과 호평과 호감과 혐오 그리고 접하는 현실과 꿈과 그 모든 것들이 어떤 기계로부터, 어떤 매체로부터 우리한테 주입되잖아요. 당장 나를 구해주세요. 형태가 없어졌다면 저를 죽여주세요.
또 하루가 지나버렸다. 집 앞을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는 시끄럽고 비까지 내리며 오늘도 푸른 요정 녀석은 창가를 보며 비 오는 날이 맑아서 좋다고 노래한다. 그나저나 아직 잠이 반쯤 깬 상태로 소파에 누운 나는 다시 잠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노랫소리가 멈춘다. 요새 심해진 불면과 불편이 잠들지 못하게 하는 마법으로 와서 편히 잠들지 못하는 나에게 '폭신하고 촉촉하게 잠들 수 있고 좋은 꿈을 꾸게 해줄게' 하는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와 차갑지만 보드라운 손이 내 이마에 올려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목소리가 우리 집 우울한데다 무료한 푸른 요정이지만 모르는 척해보자. 조금씩 편히 잠에 빠져들었다. 포근하게 들어간 꿈 속에서는 환하게 웃는 귀엽고 수줍은 아이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 나서 그 ..
아아 오늘도 일자리는 못 찾았다. 이렇게 돌아다녀도 내 일은 어디에도 없음을 안다. 그렇게 나는 내가 사는 마을로 돌아간다. 차창 밖으로 보는 하유의 풍경은 사랑스럽구나. 하지만 나는 아주 현실적인 문제로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다니. 그렇게 겨우 일자리를 찾으러 달려온, 갈아타는 여기에서 나는 그냥 걸음을 멈췄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가 아직 오지 않았고 그저 벚꽃과 매화와 살구꽃이 함께 피는 서늘한 봄날이지만 엘리뇨의 기운이 물씬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들,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빵빵 소리를 내며 도착한 버스에 올라 집에 도착해도 그저 나라에게 빌린 이 집도 언젠가는 뺏기겠지 싶어서 심란해지는 하루하루에 정신이 나가도 좋지 않을까 하며 그저 시름시름 앓는 모습으로 바깥에 나간 느낌..
그냥 그렇게 일이 다 진행되어 가는 봄날이었다. 그런 한 편으로는 내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로 전철을 타고 의미 없이 아무 곳이나 쏘다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내가 일하게 된 '영점'이라는 카페는 남서구 중심지에 있었지만 왜 개점휴업 같은 꼴인건지 모르겠고 '왜 홍보 안 해요'라고 지수에게 물으면 그저 고개를 젓는다. 그냥 가게를 붙잡고 있는 것도 힘들다며 언젠가 큰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한숨 쉬며 자리에 앉는다. 나도 한숨 쉬며 일하기 싫다는 뜻으로 고개 저으며 그저 에스프레소 기계 앞에 앉아있었다. 그러자 지수가 이쯤 하자며 일어나 돈봉투를 내게 건넨다. 월급이라니 순간 당황해서 얼었지만 가져가라니 가져가는 수밖에 없다. 무슨 월급 지급이 이렇냐 하면서 짜증을 내는 것 보다는 가만히 있는 ..
세계 표준시보다 열한 시간이 빠른 시계는 똑닥거렸고 일자리를 얻지 못한 누군가는 하유섬 한 가운데를 걸어다녔다. 전철 타고 쭉 가니 어느샌가 여기에 닿았고 여기서 해안가에서 근처의 집으로 걸어간다 한들, 나라한테 빌린 집. 살고 있는 동네가 바닷가랑 가까워서 언제나 막힐 때마다 바닷가로 가는 멍청한 니트는 남서구 한귀퉁이에 있는, 나라에서 빌려준 집에 살고 있다. 진짜로 나라가 조그마해서 주택을 배급한다고. 그런 입장에서 외람되지만 빨리 일을 해야하는 나의 처지는 한심하다 못해서 짜증난다. 이런 일상이 끝나기를 바라며 '적어도 사랑스러운 일상을 보내고 싶다'고 매일매일 바라는 바보는 집으로 들어갔다. 그나저나 오늘, 내가 타려던 게 몇 시에 온댔었나 하고 좀 더 일찍 일을 잡으러 나갔다면 탈 수 있었을..
이야기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그저 바다로 가서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잘 안 되면 다시 하려고도 했는데 역시 실제적이지 못한 내 자신이 화가 되어 그 모든 것을 불사르고 폐허로 만들고 어쨌든 차분한 내 자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과분한 것들 많이 알아야 하는 쓸모없는 것들 나를 괴롭히는데 결국에는 과묵하고 유약한 인형인걸까 떠올리면 그게 정답인데 아닌 모순. 모순이라는 어떤 싹과 마을을 벗어나는 버스. 그리고 알력다툼. 또한 상자 속에 갇혀 부정당하는 마음씨 여린 인형. 아무리 상자에서 꺼내줘도 나에게 우울한 미소만 줄 뿐이야. 그 아이는 우울하게 웃으면서 나에게 미안하다 하는데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면 언제부터인가 내 목에 낫이. 우울한 미소를 띈 유약한 인형이 나를 죽이려 해. 다시 한 번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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