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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은 아름답다. 다만 그것 뿐이라서 슬플 뿐이다. 오늘도 정원을 가꾸고 온실을 돌보고 숲을 산책하며 열매를 모으고 물가에서 마실 물을 길어왔다. 그리고 아이와 요정, 동물들과 함께 폭신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불을 지펴놓은 채로 내리는 바람에 철길을 따라 혼자서 내달리는 증기기관차를 붙잡아서 차고까지 몰고가며 철길 위로 놓인 전깃줄이 아직 팽팽한가 살펴보기도 했다. 그렇게 섬은 빛났다. 다만 그것 뿐이었다. 계속 그 뿐이라고 이야기하며 차고에 도착했을 즈음에 나는 피곤해져서 잠시 근처 풀밭에 누웠어. 그리고 예전 기억이 한데 뒤섞인 악몽을 꾸었다.

이 섬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사람들이 하유라는 섬나라로 갈 때, 나도 그 안에 있었지만 의외로 사람들과 같이 살기 싫었던 나머지, 나만 통나무 배를 타고 그냥 떠다닐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그 생각을 접고 여기, 하유섬의 남서쪽 바다에 있는 무인도를 발견하고 통나무 배로 넘어갔다. 아주 아름답고 조그만 섬이었다. 그래서 여기에 나만의 낙원을 만들자 싶어서 여러모로 꾸민 결과는 지금 내가 살고있는 여기, 정원섬이다. 섬의 순한 동물들 중에서 가장 영리한 여우는 복슬복슬해서 따뜻했고 숲에 사는 요정들도 나에게 호의적이어서 숲에서 자라는 맛있고 배부른 것들을 가르쳐 주었지만 나는 외로웠어.

그래서 요정들에게 외로움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물어보니 '자신의 마음을 깃들인 인형'을 만들어보래서 나는 고민하다가 잠시 마을로 나왔다. 그런데 남서쪽에 닿자마자 나는 갑자기 체포되어서는 '왜 남서쪽 해상의 섬을 점유했느냐'라는 조사를 받았고 겁에 질려 횡설수설하던 네 시간 끝에 '당신의 섬이 큰 섬의 지배를 거부한다면 좀 안 좋을거다'라면서 나를 풀어주었고 그렇게 맥이 빠져 내 배를 찾으러 나루로 가던 때, 나는 인형가게에 들러서 첫 눈에 반해버릴 정도로 근사한 은발회안에 새하얗고 보드라운데다 말랑한 살갗을 가진 구체관절인형 남자아이를 사서 내 섬으로 돌아왔다. 너무 귀여워.

나의 섬으로 돌아와서는 온실에 들어와 그 귀여운 구체관절인형에게 내 마음을 깃들이고 정작 나는 온실 맨 구석에 숨어버렸다. 이유는 요정들이 '인형에 마음을 깃들인다는 것은 그 인형을 또 다른 자신으로 만들어내는 것과 같기에 외모와 성격이 서로 닮게 된다'는 말 때문이었다. 내가 이 섬으로 와서 혼자 살고 있으며 이 섬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큰 섬의 지배를 받기 포기한 이유가 나의 관철하기 좋아하고 고집세며 우악진 성격 때문인데 나와 같은 존재가 하나 더 생긴다니 무서웠던 것이다. 하지만 이내 살아 움직이게 된 인형마저도 나처럼 무서워하며 '왜 내가 스스로 움직이고 있을까요' 하면서 두려워하고 있는, 왠지 소심하고 유순한 남자아이가 되었다.

"안녕, 만나서 반가워. 기분은 어떠니?" 왜 자신이 스스로 움직이고 있냐며 두려워하던 그 아이에게 내가 처음으로 건넨 말. 왠지 첫 눈에 반해서 데려온 그 은발회안에 하얀 살갗이 그대로 남은 귀여운 아이에게 '시안'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어루만져 주었다. 그 아이가 내게 처음 건넨 말은 '나랑 닮았다'라는 말. 그 아이도 녹아내리는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나를 어루만졌다. 서로는 그렇게 어루만지며 첫 인사를 했지만 왠지 시안이가 자기가 나랑 닮았다고 하는 것이 영 거짓말같았다. 그래서 '나는 너를 닮지 않았어'라고 말하자 표정이 비눗방울 터지는 것을 눈 앞에서 본 듯이 살짝 놀라는 표정으로 변하더니 '아니야, 나랑 완전히 닮아있어서 같은 틀에서 나온 형제같아'라고 그 아이가 말해주는 악몽.

나를 깨운 것도 그 아이. 시안이는 너무 눈물을 흘린다고 악몽을 꾸었냐면서 내게 묻는다. 귀염성 있는 인형소년 시안이는 너무 무서운 꿈이 아니었기를 바란다며 진심으로 나를 토닥여주었다. 그리고 내 옆에 누워주었어. 누운 그 주변으로 새 잎이 나면 옛 잎이 떨어지는 굴거리나무와 향기가 달콤한 목서가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었고 바람에는 로즈메리와 라벤더 향기가 실려와서 참 기분이 좋았다. 쓰다듬어 달라는 시안이 녀석을 쓰다듬어주며 향기로운 바람에 얼핏 잠이 들었다.

온실 안은 따뜻하다. 마치 시안이의 상냥함 같기도 하고 독초지만 꽃이 참 귀엽고 향기로운 은방울꽃 같기도 했다. 섬의 날씨가 아무리 더워도 온도계는 22도 이상을 가리키지 못했고 그 덕분에 나는 폭신하고 촉촉한 나날을 잘 지낼 수 있었다. 여름이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서늘하고 일 년내내 촉촉한 이 섬을 정원으로 꾸미고 철길과 길을 만들고 물레방아를 돌려 전기를 만들게 되었을 때, 정말로 기뻤던 기억이 떠오른다. 목서 가지 위의 비둘기 한 쌍이 구구거리다가 날아가고 날아가는 비둘기에게 '오늘은 어디로 날아갈거니'하고 물어보는 순진하고 동화같은 나날이 시안이와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

온실 속 식물들을 돌보고 있자면 왠지 구체관절인형 특유의 관절이 보여서 고개를 드니 조금 걱정스럽게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시안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새하얀 인형이 눈을 뜨고 반짝이는, 그리고 약간 푸른듯한 은빛 눈동자를 보여주었을 때, 그리고 이 소심하고 착한 아이가 뭔가 조금 당황스럽지만 호기심이 가득한 귀여운 표정을 하고서 푸른빛이 도는 은빛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이 아이에게 '식물들은 다 건강해'라고 해주었다. 새하얀 인형소년은 갸웃거리며 이내 내가 한 말의 울림이 마음에 드는지 살짝 오므린 손을 가슴에 대고 살포시 눈을 감았다. 너무 귀엽고 투명한 유리구슬같은 느낌이었다.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는 시안이의 부드러운 은빛 머리카락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으며 귀엽다고 해주자 얼굴을 붉힌다. 그렇게 시안이에게 일은 디 끝났으니 달콤한 것이라도 먹을래라고 권했지만 괜찮다면서 덧없이 웃는 모습이 왠지 불쌍했다.

폭신한 여우는 나의 친구. 가끔씩 내가 외출 나오면서 챙겨온 간식을 먹어치워서 난감하게 만드는 녀석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미워할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