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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폰 자체가 끊기지는 않았으니 주택공사 전화번호 찾아서 전화를 건다. 나 좀 살려달라고, 직원이 와서 대문을 쇄정하고 가버렸는데 나가지 못하면 집세를 벌기 위해서 일 찾으러 나가지도 못한다고 연락을 취하기는 했다. 또한 푸른 요정은 바깥에서 쇄정장치를 풀어주려고 하다가 눈에 생기가 나간 채로 그저 대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게 대문 쪽에 난 작은 창문을 두드려 푸른 요정을 불렀다. 그리고 자기를 '루미'라고 불러달라고 힘 없이 얘기한다. 근데 있잖아, 요정이 자기 이름 가르쳐 주면 마력이 반토막 나지 않아? 그런 질문에 대답은 아깝다고 하는 푸른 요정 루미였다. 에스페란토로는 '빛나다'라는 뜻이고 핀란드어로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라는 뜻인데 이름 귀엽다고 하니 지금도 현실도피하냐며 굶어죽으려면 자기도 죽을 거라고 협박한다. 그나저나 쇄정장치나 풀어줄 주택공사 직원은 늦는 것 같으니 쫓겨날 짐을 싸자.

집을 떠나온 나는 집세가 밀렸다는 이유로 주택공사에서 쇄정한 내 집 대문을 생각했다. 내가 애원하며 몇 번을 전화를 거니 인도적 차원에서 잠시 열어주겠다고 해서 필요한 물건을 다 챙기고 집에서 나왔다. 하지만 집세를 벌고서 집을 되찾으려면 일자리가 있어야 하는데 없다. 그리고 그렇게 집을 나와서 마땅히 갈 곳은 저기, 통제된 정원섬이나 북동쪽의 카페 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또 다른 곳을 떠올리고는 그곳으로 향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서 나를 위해주는 사람이라 하면 그 아이가 있고 조용하지만 역시 누군가를 잘 위해주는 아이니까 나를 받아줄거라는 찌질함을 가득 안고서 그 아이 집 앞의 초인종을 눌렀다. 그 아이는 분명 나를 받아주지만 싫은 티를 낼 테지 하면서 반신반의하며 초인종을 누른다. 그리고 새하얀 남자아이 모습을 한 자동인형이 자기 집 대문을 열어젖힌다.

그렇게 봄이는 보고서 놀란다, 큰 짐을 싸온 나를! 놀라는 그 여린 소년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주택공사에서 집세 내라고 몇 번 왔는데 돈 없어서 무시했지. 그랬더니 그 놈들이 집 대문을 완전히 못 열게 꽉 잠가버렸어라고 말하니 일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냐고 좀 멸시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머리를 싸맨다. 비참하구나. 하지만 내가 죽는 꼴을 보고 만다면 멎어버리고 싶을 테니까 잠시 자기 집에 있게 해주겠다는 봄이가 나는 감사했다. 그리고 나는 짐을 풀고 북동쪽으로 향했다. 그러는 전철 안에서 행복한 웃음을 보기도 한 나는 너무 가슴이 아팠다. 눈물이 나왔다. 하지만 내 일도 스스로 못 찾고 그저 무서워하는 나도 있으니 울 자격은 없어. 그래서 북동쪽으로 가는거야. 몇 번이고 자기 일은 자기가 찾자며 쫓아내던 그 아이에게 또 매달려야 한다. 그렇게 되어도 또 그 아이는 나를 쫓아내겠지 하면서 계속 의심에 의심이 되지만.

그렇게 나와 마주친 새하얀 여자아이 모습을 한 자동인형도 나를 보고 놀란다. 그리고 우선 자재창고로 나를 밀쳐넣고 기다리라 한다. 그리고 이내 자재창고로 돌아온 나리는 정녕 일자리가 기다리지 않더냐 하면서 나를 몰아세우는데 그게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니 한숨을 쉬고, 그럼 정원섬에 살며 자기의 섬이 하유국에 편입되는 것을 애매하게 꺼리며 주권이양서에 서명하지 않는 그 이야기를 하며 그 애가 문서에 서명하는 것이 더 빠를 뻔했다고 자재창고에 그냥 스스로 못 움직이는 인형처럼 처박혀 있으라고 했다. 그런데 진짜 몸이 움직이지 않아. 뭐지 싶었는데, 내 눈 앞에는 푸른 요정 루미가 '못 움직이게 마법을 걸었으니 못 움직이지' 하면서 나를 빤히 바라보는 꼴이 있었고. 그리고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카페 안의 전등이 다 꺼지고 나서야 장난스러운 얼굴로 '땡'이라 하며 마법을 푸는 루미 녀석. 그리고 이리 오라고 명령하는 나리. 자리에 앉자 서류부터 꺼낸다.

서류인 즉슨, 근로계약서다. 자기가 다 책임질테니 쓰랜다. 어차피 자기는 인형이라 속이 비어있으니 고집 부리던 말던 네놈은 일 못 찾지 않느냐고 하면서. 고용주가 서류를 내민 이상에는 써서 준다. 그리고 교통비 일시불이라며 주는 돈은 만 오천 정도. 그런데 만 오천이면 이미 집 가고도 남는 돈이고 근로계약서 받는 저의와 자기가 졌다는 말에서 들어보면 '집 대문이 공사 직원에게 쇄정당한 이상에는 일자리를 줄 수밖에 없다, 한심한 인간아' 같은 느낌이 확 든다. 근로계약서 쓴 것을 근처 문구점에서 복사해서 복사본을 가져가라며 자기는 이제 나 일 시켜야 한다며 멍청한 짓을 했다고 자책을 하는데 나는 차비 몇백 원을 내고 집세 낸다고 전화한다. 그리고 전철 안에서 밀린 집세가 얼마냐 사자후를 지른다. 곧 갚겠으니 일단 만 얼마 내겠다고 쇄정 푸라고 명령한다. 곧 가겠다고 당황한 직원과의 통화가 끝나고 집에 도착하니 쇄정이 풀린 동시에 집세는 여기로 보내달라는 쪽지가 있었다. 바로 그 쪽지에 적힌 계좌로 만 사천 원을 보낸다.

그렇게 겨우겨우 집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다음 날 아침은 깨운 드릴 소리를 듣다못해 출근길을 겸해서 뛰쳐나오니 집 앞의 전차선로가 뜯긴 것을 본 나는 마을사무소에 전화를 걸어서 전차선로 뜯는 것이 마을 협의사항이냐고 물었다. 그런데 모르겠고 교통공사에 물어봐요, 뚝. 하는 수 없이 버스를 타고 남서중앙역까지 가는 도중에 교통공사에 전화를 걸어보니 단순한 보수공사인데 사실 노면전차 폐지민원도 있어서 복잡해요, 뚝. 그렇게 이러쿵저러쿵 하는 녀석들의 떠넘기기가 얼마나 짜증나던지 나는 들고있던 폰을 전철 개찰구 근처에서 패대기 치고 말았다. 액정이 나가버린 폰을 보고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도 했지만 일단 참고, 지금 향하는 곳과 가까운 중심지인 북동구청역에서 내려서 제일 저렴한 가운데 단단하다고 소문난 하나를 골라 잡아서 SIM 카드를 갈아 전화기를 부활시킨다. 이런 폰 써보는 것은 참 오랫만이고 무엇보다도 노면을 달리는 궤도선이 전부 멈춘 통에 버스는 혼돈의 수라도가 펼쳐졌다. 전화가 울리고 짜증나서 전화를 박살낸 바보라고 밝히고 겨우 나리네 카페로 출근하니 시간은….

주문을 받고 커피를 만들고 디저트를 준비하는 일련의 과정. 그리고 성질 못 이겨 박살난 스마트폰과 그것을 대신하는 단단한 피처폰, 멈춰선 노면전차가 나는 꽤 짜증났다. 라디오 뉴스에서는 버스 대란과 그로 인한 혼란이 가중되므로 노면전차의 일방적 폐지를 철회하라는 시위가 중앙구 하유교통공사 앞에서 열렸다고 전했는데 어쩌면 나는 계속 흔들림이 트램보다 심한 버스를 타고 남서중앙으로 나와서 전철로 갈아타고 하는 일을 계속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복잡했다. 그리고 밀린 주문 때문에 뒤통수를 얻어맞고 카페 내부에서 말하는 것은 전부 '갑자기 멈춰선 트램을 찾아서'였고 그런 것에 대해 나는 손님에게 감히 사견을 말하면 안 되겠지. 일단은 갑자기 멈춰선 노면전차에 대해서 여러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곧 그 내용은 잠잠해졌다. 라디오에서 잠시 후 담화가 있겠다고 한 뒤, 하유교통공사 사장이 여러분을 불편하고 불안하게 만들어서 미안하고 대대적으로 선로를 뜯어내고 다시 까는 공사를 하는 것인데, 통보 안 해서 죄송하다는 내용으로 노선을 좀 더 직선화하고 안락한 대중교통을 만들겠다고 담화를 마쳤다.

당분간 버스 출근이라 골치아프네. 그리고 나리도 트램 덕에 사람들 많이 오는데 좀 손님 줄을 생각을 해봐야 겠다고 말하지만 어쨌든 다음 날부터 트램이 돌아온다고 발표가 끝나자 무슨 이게 장난이냐고 또 카페가 술렁인다. 그런데 그 술렁임에 갑자기 답답해지고 어딘가 조여오는 기분에 나는 나리의 걱정도 뿌리치고 가까운 숲 속으로 향했다. 술렁거림과 사람이 많은 장소는 싫어. 그렇게 숲으로 도망치고 주위를 둘러봐도 뵈는 것은 없고 나는 머리를 쥐어뜯다가 결국 흉한 모양새를 한 채 네스토 데 피고로 돌아왔다. 카페에는 버스가 집 앞까지 바로가서 좋은데 갈아타는 것 빼면 전철이 낫지 않냐하면서 서로서로 집으로 가고 흉한 모습으로 돌아온 나에게 화나지만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다시 일하라고 손짓하는 나리가 있었다. 나는 조용한 것이 좋은데 내가 그냥 안 좋은 상황에 맞춰야 하나, 트라우마가 나오는데 하면서 일로 돌아갔다.

오늘 일도 끝. 집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당분간이 아니라 내일 당장 트램을 재개해야 한다고 싸우는 상록선 트램 공사판의 소리하며 상록숲으로 들어갈수록 사라지는 분주한 소리에 마음을 식혔다. 숲의 안 쪽으로 들어간다. 온통 숲 뿐인 상록구에서 할 일은 그저 토끼를 만나면 귀여워해주기 정도라서 오늘은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 토끼를 기다렸다. 토끼 한 마리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다섯 마리 여덟 마리 열세 마리…하면서 피보나치 수열만 외던 나는 구청 직원에게 너무 깊게 들어오셨다고 소지품 검사를 당했다. 의외로 기분 나쁜 이 과정이 짜증나서 나를 예비 자살자 취급하냐고 질렀지만 그 탓에 겨드랑이를 잡혀서 제압당했다. 쓸데없는 짓을 해서 매를 벌은 셈이고 내 가방을 다 어지르고 나서야 가셔도 좋다고 제압을 풀었다. 어쩌라고 이러냐. 그러는 사이에 또 해는 져가고 평소처럼 전차 정류장으로 갔지만 오늘의 그 소동을 잊었나. 결국 북동카페거리 쪽으로 걸어가서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피곤하군.

집 바로 앞의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전차선로는 다시 깔려있고 그렇게 하루 해프닝이 끝나는 좀 늦은 저녁 시간이 되었다. 늦은 저녁, 그렇게 흘러가도 좋은가 하는 생각을 제쳐두고 시운전하는 전차가 급정거하는 소리와 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해안가를 창가로 바라보며 언제 사라질 지 모르는 행복을 만끽하는 지금이었다. 그런데 못 보던 지하도 공사라니, 또 마을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노면전차 복구했으면 됐죠, 뚝. 이제는 구청으로 걸어본다. 지하도요? 아는 바가 없습니다만, 뚝. 그러면 이게 뭐냐 확신할 수가 없잖아. 그리고 싸구려 폰을 나두고 어디에서 싸게 구한 스마트폰으로 바꾸고 나와 다시 방을 열고 출근길을 나선다. 마침 트램이 온다. 그렇게 전철을 타고 여기저기 둘러보기는 둘째치고 북동구의 일터로 가는 지금, 한산한 숲 속을 벗어나 낮은 상가가 모여있는 외곽의 거리로 도착하기까지 그저 오늘을 보낸다 같은 것은 됐고 즐겁게 흘러가기 바라면 욕심일까 두서없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아차, 내릴 정류장 놓칠 뻔했네. 하지만 놓치지 않았으니까 내리자.

네스토 데 피고. 까치 둥지라고 하는데 파이의 어원이 까치라서 그렇냐고 물어보니 그렇다고 끄덕이는 나리와 커피만 주문하는 오늘의 첫 손님은 벽화였다. 나리 말하길, 상록구 산다는데 가난해서 커피 한 잔에 벽화를 한다고 이상하다 내게 말하지만 나는 이해가 안 갈 것도 없다고. 그런 말을 들은 나리는 나에게 대걸레 자루를 툭 넘기더니 그냥 일하라고 말하고 좀 끈적하다 싶은 바닥을 엄청 닦는다. 그리고 일단은 걸레는 자재실에 놔달라는 부탁에 자재실에 놓아두고 잠시 있는데 뭘 멀뚱하게 있냐고, 에스프레소 기계 다룰 줄 아냐고 묻는데 할 줄 안다니까, 해보라네. 그리고 본의아니게 룽고를 뽑아버린 나는 그건 네가 마셔라 하는 나리에게 좀 실망했다고 직접 말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짤릴 판이니까. 어쨌든 돈을 벌고는 있으니 만족하는 와중에 일은 실수 없이 한다면서도 왜 일을 그렇게 못 잡고 있었냐는 말에 대답은 못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쪽팔리고 할 말이 없으니까.

오늘 일은 끝. 수고했다며 교통비 명목으로 얼마간 준다. 하지만 그렇게 받고 싶은 돈은 아니어서 거절하니까 닥치고 받으라고? 그래서 받는다. 그리고 네스토 데 피고는 갑자기 어두워져서는 나를 뱉었다. 내일은 공휴일이니 잘 쉬라고 하는 나리와 헤어지고 전차를 기다리는 그 안전지대 위에서 전차가 안 온다고 숲 속으로 들어가는 시안색 택시나 째려보면서 계속 기다렸다. 그리고 심심해서 면허의 급을 올릴 겸 보았던 운전면허 도로주행시험은 보기좋게 반클러치 문제로 떨어졌고 그 덕에 왼다리를 절면서 집에 왔다. 집세를 벌어야 하니 이제 일할 명분은 있는데 그게 다다. 집세를 벌고 집을 지켜냈다. 이제 대문이 쇄정될 일은 없으니 그게 행복한 삶인가 생각했다. 생각이 더 이상 미치지도 않고 그저 바깥에 트램이 오고가는 것을 창문 너머로 멀뚱히 지켜본다. 자동차를 몰면 그나마 나을까 싶지만 하유에서 자동차를 몬다는 것은 꽤 번다는 것과 같은 말이라서 이내 생각을 관둔다. 트램이 오늘따라 귀엽게 느껴진다.

그러나저러나 불면이 찾아온 그 밤에 도저히 잠도 못 자겠고 트램도 운행이 끝났고 모든 소리가 드문 정적의 밤에 잠시 외출을 나갔다. 고양이가 지나가는 것에도 깜짝 놀랄 정도지만 여튼 잠이 오질 않아서 그저 걸어갈 뿐이다. 그리고 걸어가다가 문득 여기가 어딘가 정신을 차려보니 아무런 생각이 나지를 않고 주변은 암흑천지였다. 그리고 차분히 눈을 뜨니 내 방이었다. 루미는 팔짱을 끼고 내 옆에 있었다. 불면에 악몽까지 겹치냐고 비아냥거리면서. 트램이 다니는 것을 보니까 지금은 날이 밝았다. 상황 파악이 끝나고 이제 출근 준비를 하려는데 폰이 울린다. 오지 않아도 되는데 짤린 것은 아니니 오늘은 쉬라는 나리의 전화, 그리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루미. 같이 외출하자는 의미겠지만 그럴만 한 여유가 없거니와 아까 전까지는 불면에 악몽이냐며 비아냥거리던 저 푸른 요정을 괜히 상대했다가 나만 나빠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버렸다. 문 세 개짜리 트램이 지나가는 옆 길로 문 세 개짜리 버스가 지나가고 버스 뒤로 자동차들이 지나가는데 어쨌든 집 앞까지만 나가고 나는 다시 들어가니 누가 싫은 소리를 낸다.

다음 날도 출근. 출근이 반복되고 단조로운 일만 하다 보니까 그냥 하루하루는 무의미하고 짜증나는 바였다. 내가 시는 동네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출퇴근 때마다 타는 트램이라 짜증날 뿐이었다. 그 탓인지 오늘부터 내각 조례상 내연기관 자동차가 못 들어가서 남서해안주택단지 - 상록숲 간의 버스 노선에 전기 버스가 들어가게 된다는 것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기분이 퍽 심란해져서 멍청하게 있는 나를 놀리는 나리와 그렇게 트램 철거 논쟁에 유감이라고 하는 논평에다 대고 그렇게 트램이 좋냐고 하는 여론에 놀라는 나는 그냥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그만 두었다. 어차피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니까 그렇겠지 하면서. 트램이 갑자기 없어지는 상상도 해보고는 몸서리를 쳤지만 그게 오히려 일에 집중하게 만들어주는 아이러니로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