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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문/흩어지는 글을 모아서

맑고 촉촉해

두번의 봄 2018. 10. 30. 21:22
귀엽고 수줍은 은빛 머리카락에 회색 눈동자를 가진 인형 남자아이. 녹는 표정으로 걱정 마라고 나에게 위로를 건네는데 나는 그 아이가 뭐라고 하는지 알고 싶지도 않아서 제발 나를 아프게 하지 말라고 부탁하죠.

그러자 나를 와락 껴안는 그 아이는 모든 것이 잘 될테니 고민은 마라고 진심으로 바라주지요. 하지만 이 아이는 인형이고 내가 아니니까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하얀 아이는 나는 당신이라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아이에게 미쳤다고 얘기하죠. 그러면 말 없이 눈을 살포시 감고 눈물을 흘리죠. 그리고 나긋하게 '저는 당신이고, 당신은 저예요. 제발 부정하지 마세요'하고 속삭이는 목소리로 얘기하지요.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나 마저도 나를 안고서 조용히 울고있는 이 하얀 인형소년이 오래 전에 내가 약한 모습으로 낙인찍고 꿈 속에 가둬버린 내 모습인가 생각해요. 그럴 리는 없지만요. 그리고 이 아이를 인정한다면 지금의 위태로운 내가 사라져버릴까 두려운거죠.

'미안해. 너는 내가 아니야. 네가 착각하는 거야'라고 내가 말하면 그저 더 따뜻하게 안고서 말없이 더 서럽게 우는 이 아이가 불쌍해. 하지만, 이 아이는 신비롭고 상냥하니까 내가 아니에요. 그래도 오묘하게 이 아이가 나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차가운 인형일 뿐인 그 아이를 점차 이해하려고 해요. 하지만 나는 이 아이를 쓰다듬어줄 수도, 좋아한다고 말해줄 수도 없어요. 현실로 나오면 금방 죽어버릴 아이이기에.

그 아이가 사는 곳은 맑고 촉촉한, 서늘하고 숲 속이 기분 좋은 섬. 그래서 그 아이가 같이 숲을 걷자고 수줍게 웃으면 같이 숲 속을 걸으며 토끼도 만나고 나무열매도 실컷 먹고 서로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죠. 왜 이게 현실에서 불가능할까 하면서요.

그리고 나는 잠에서 깨어납니다. 새하얗고 착한 인형소년은 현실에 없어요. 하지만 마음만은 맑고 촉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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