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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대충 만남은 일단락 되나 했는데 아니었다. 아직도 구직활동은 구질구질하게 계속 해야 하고 그런 나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표리부동한 철면피였다. 그나저나 왠지 집에 눌러붙은 푸른 요정은 아무것고 자기는 모르겠고 이불은 폭신폭신 하면서 잘 쉬니까 나도 자연스럽게 걔를 따라 게을러져서 구직활동은 그만 두었다. 취직 못하고 구직활동도 못하면 나라에서 나오는 취업장려금도 끊기겠지만 그런 걱정은 나중에 하자는 식으로.

그러던 중에 마을사무소에서 부르기에 좀 불려나가니 마을을 개발하는 건에 대한 토론이 열렸다. 왠지 노면전차 뜯고 지하철 짓자는 얘기가 나오고 그런다. 그런 자리에 참관으로 있던 동백통 사람들이 그럴 바에는 내각을 설득해서 교통이 불편한 동백통으로 노면전차를 연장하는 편이 낫지 않냐고 말했고 그 동시에 곤란하다는 말이 터지자 서로가 육탄전 시작. 하지만 나는 일단 그 현장을 벽 너머로 듣고 있었을 뿐, 마을에서 여는 설명회에서 언제나 먹을 수 있는 구정물 커피와 생강과자는 그저 그렇다는 마음 속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체할 것 같아.

서로 싸우기까지 했는지 피를 흘리며 나오는 사람들도 있고 보기에만 평화로운 하유라며 이 나라의 공용어 중 하나인 에스페란토로 흘기는 소리와 기타 푸념이 한국어와 일본어 및 영어로 흘러나온다. 회의에 참가하지 않은 주제에 회의에 대해 생각하고 그 탓에 계속 이어지는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을 하다 나도 한숨쉬며 설명회장을 나갔다. 구정물 커피 덕에 속도 쓰리고 짜증난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도로와 철길이 나를 부르는 느낌에 그냥 무작정 멀리 가자 싶어서 철길을 따라 그 끝까지 가기로 한다. 남서중앙역까지 가서 열차를 한 번 갈아타 북동중앙역을 지나면 남북선 전철은 북동구청역에서 끝나버린다. 조금 더 위에 있는 역으로 안 들어갔으니 이게 끝은 아니지 하며 삼십 분 기다려서 하유제당선으로 들어가는 열차를 타고 단 하나의 역을 향하여 가면 하유국 여객철도는 첨채로역, 여기서 끝이다. 첨채로역에서 내리니 묘한 기분이 쫙 펼쳐진다. 여기가 사실은 공장으로 들어가는 철길이고 날씨도 추워서 그런가 싶어서 좀 걸어본다.

그나저나 이 철도라는 것도 같잖은게 하유국 내각은 철도에 관심이 전혀 없었고 철도는 필요없다는 시위도 일어났었다. 하지만 버스로만 때우기에는 이미 한계가 오긴 왔고 그러니까 지하철을 놓자는 여론이 있기는 했는지 중앙업무지구에서 미여울공원까지만 지하철 뚫고서 끝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하유섬에서 단 하나 뿐인 공장을 갖고있는 하유제당이 '설탕포대를 관문섬으로 옮기기에 도로는 너무 막힌다'고 자기네 전용철도 노선을 갑자기 놓겠니까 내각이 그제서야 '너네들은 돈을 대라, 우리가 공항과 항구가 있는 관문섬까지 철도를 놓겠다'고 말을 바꾸어서 남북선을 지었나. 여튼 쓸데없는 설명이 길었어. 어차피 여기 지리도 모르겠으니 그렇게 첨채로를 따라 무작정 걷다가 길을 잃었다. 해는 지고 배는 고프고 공허해져서 무작정 북쪽으로 도망왔지만 이 조그만 섬나라에서 어딜 도망간다고 이렇게까지 왔는지 짜증은 모르겠고 우선은 공포스럽다.

춥고 배고프다. 그러는 와중에 카페거리 같은 곳에 들어섰다. 가로등이 켜지는게 무섭다. 그리고 어디선가 누가 손을 흔드는게 보인다. 히익 놀랐는데 손을 흔들던 은빛 옅은 파란 눈동자의 어떤 소녀가 보였다. 갸웃거리며 길을 잃었다면 이미 카페는 닫았지만 특별히 열긴 하겠다고 한다. 불길해서 아아 나는 오늘 어떤 북동구 인형한테 잘못 걸려서 인형되는구나 떨면서 그 애가 닫았던 건물 문을 여니 함께 딸랑이는 작은 종소리도 무서운 이 와중에 자기 카페에 들어오라는 듯이 손짓하는 것을 믿어도 될까하는 공포에 감싸여 그 아이가 가게의 불을 켜고 커피를 갈고 물을 끓이는 동안에도 그대로 굳어서는 뭐 이런 경우가 있냐 싶어했다. 이윽고 따뜻한 커피와 함께 내가 앉은 자리에 온 소녀는 자기 이름이 '나리'라고 했다. 외떡잎식물 이름과 같은 단어를 들으니 왠지 좀 거북하다. 그저 이름인데도 거북한 느낌이 든 것은 이 아이가 인형인데다가 여기는 북동구 카페거리라서 그런 거겠지.

그나저나 나놈아, 지금 목전의 얌전한 소녀인형을 똑바로 보고서 무섭다고 뱉었냐. 왠지 그런 모양이었다. 나리 표정이 '나는 물지 않아, 너를 인형으로 만들 생각은 없어'라는 의미로 변했으니까. 이 커피를 마시고 반드시 돈을 내야 철면피라는 소리 안 듣겠지 하면서 오늘 장사가 이미 끝났는데 길 잃은 사람한테 몸 녹이라고 주는 커피는 됐고 근처의 역이나 정류장 가르쳐달라고 하자 갑자기 웃음짓고는 메모장과 펜을 들고 온다. 그러고서는 '내가 이 정도 호의를 보였는데 경계하는 별난 사람이네' 하면서 전화번호 내놓으래. 크고 깊게 한숨쉬고 살기 위해 결국 전화번호 적어주니 근처에 역이 있다며 바래다준다. 근데, 더욱 심란해지는 기분이 들게 하는 상록숲역이야. 그러니까 나는 그 소문으로만 듣던 북동구 인형 괴담 속의 장소를 갔다온 셈이 된다. 나리는 '여기에 금방 전철이 올거니까' 하면서 다시 카페로 돌아갔고 그냥 나는 속아보자는 심정으로 이내 정류장에 도착하는 전차에 타고 나도 집으로 돌아간다. 그래봤자 상록숲을 달려 북동중앙역까지만 향하는 전철부터 시작해 세 번 정도 갈아타고 갈아타서 겨우 집 앞으로 걸어갔다.

이런 기분에 또 어디 싸돌다 오냐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쉽게 좋아질 리가 없다. 이어지는 푸른 요정의 독설 때문에 기분 나빠진 나는 바로 방으로 들어갔고 의문의 호에에를 듣지. 북동쪽에서 카페를 하는 아이와 마주친 하루가 지나, 피곤하고 베개가 너무 폭신한 아침이 왔다. 졸음을 이기기 위한 잠깐의 외출을 하자. 전차가 지나가는 그 사잇길을 걷는 동안의 매 순간마다 전차가 내 옆으로 휘익 지나갔다. 이 길가를 걸으면서 또 무슨 공허함으로 가득차서 그냥 이유없이 걷고 이러는걸까.

전차가 지나가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 역시 나는 이쪽에도 저쪽에도 끼지를 못한다. 그나저나 마을회의에서는 노면전차를 지하철로 바꾸는 논의가 있었던 것 같은데 옆동네 동백통에서 차라리 노면전차인 채로 두고 연장을 해라 하니까 이 사람아 속도를 높이는게 우선이네, 아니다 우리도 시내 좀 편하게 나가자 하는 통에 싸움이 일어난 듯하다. 어찌됐든 좋으니 그만 싸우라고 중재하는 사람 없이 다 피를 본 거다. 그리고 나는 그 과정에 의도적으로 끼지 않았다. 바깥에서 구정물 커피와 밍밍한 생강과자 먹고 있었으니까.

버스와 전차가 같은 신호를 받고 앞으로 나아가는 그 모습과 횡단보도 지나 동네 바닷가 나가려면 또 귀찮고 졸려서 아아 집에 갈까 싶었다. 그럴 때는 생각을 더 안 하는 것이 좋아서 그냥 생각없이 집에 들어오니 무료한 요정은 소파에서 졸고 있고 왠지 내 인기척을 알아채고 있는 듯하다. 오늘 있었던 마을회의는 그렇게 유혈엔딩을 맞았건 뭐건 하루가 저물도 내일이 오면 다 꿈만 같아서 왠지 괴롭다. 그런 하루를 더 괴롭게 해주는 마무리는 언제나 뉴스를 보는 것. 남서구 해안통에서 남서선 노면전차의 지하철화에 대한 토론회가 열렸는데 동백통 쪽의 참여자들이 해안통 쪽의 참여자들과 피를 보면서 싸웠고 결국 내각이 이를 중재하는 의미로 우선 노선을 전부 뜯어고치는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밝히는 보도를 보았다. 뭐야. 놀라서 창 밖을 보니 공사판이 이미 집 앞에 펼쳐지고 있어서 한숨나왔다.

계획이 아니라 이미 설계까지 끝내놓고 뒤집을 준비 중이었냐 흘기며 집 앞의 공사판을 사진 찍어놓았다. 길 가던 자동차들이 웬 오발탄이야 하면서 빵빵대고 동백통이 원하던 대로 남서선 연장이 진행되는 집 앞을 살짝 떠나 공원으로 나가자 생각만 하자. 봄이 오는 가운데에서 아직 산수유도 피지 않은 지금, 드르륵 쾅하는 소리가 시끄러워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다 짜증나서 닫아버리고 싶었다. 일상이 없어 이렇게 괴로워 하는 것이 너무 싫어서 곹옹의연속쓸액이가튼나핵열채근잣알뿐이라 외치며 눈이 죽어가던 도중, 푸른 요정이 나를 꼬나보는 눈빛이다 헤헤. 그리고 뺨을 가격당했다.

미안하다고 너 정신 놓으면 내가 얹혀사는 이유가 없다며 뭐라 다그치는데 그저 무시하고 마는 도중에 계속 메리 수가 얘기를 하네.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지만 다른 독자는 이해할 수 없다네. 내 이야기 대부분의 사건과 소재가 메리 수, 메리 수라고 노래하다가 듣고 있냐는 푸른 요정의 화난 목소리를 듣는다. 화난 표정의 푸른 요정이 갑자기 '다 됐고 너 너무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어보이고서 그냥 이거 가지라며 나한테 뭔가를 쥐어준다. 푸른 요정이 손에 쥐어준 것은 파란 구슬. 내 주변에 한 가득이라 너무 걱정된다며 좀 그만 우울해하면 덧나냐고 외치는데 네, 알겠습니다. 메리 수 그 자체인 요정님.

드르르륵 쾅쾅하는 공사판 소리와 함께하는 백수와 요정의 오후는 참 시끄럽다며 베개를 뒤집어 쓴 푸른 누군가하고 마을회의에서 의견을 냈더라면 지금 당장 안 시끄러울 수 있었을까 하는 한량의 시간이었다. 다행히 승강장 넓히고 도로 차선을 다시 긋고 하는 공사는 금방금방 끝나갔다. 이런게 노면전차의 장점이겠지. 그리고 '남서선 해안로4가 - 동백통사무소 간 연장개통'이라 무려 네 개 언어로 적힌 꽃전차가 지나갔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철도선 열차와 궤도선 열차가 서로 중련된 채 차고지로 회송하고 있었다.

이제 공사판이 닫히려나 싶은 때, 자동차 일련들이 '도로나 넓혀다오'라는 의미인지 궤도 위를 막아서버려서 오도가도 못하는 전동차는 몇 번이고 경적을 울려댔다. 그래도 시위가 길어지니 경찰이 와서 철길 위의 자동차 끌어가는 오합지졸을 보았다. '이런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나는 참 행복해'라고 느끼면서도 답답한 기분을 푸른 요정 괴롭히며 풀고 있었다. 볼도 주물거리고 쓰다듬기도 하고 하면 어느샌가 싫은 표정을 보고 물러서기 일색이라 '그렇게 무료하면 나가던가'라고 푸른 요정한테 잔소리 듣는 오전이 흘러갔다. 그래, 무료하면 나가야지.

그렇게 나와서 주변을 둘러본다. 비가 올 것 같은 하늘은 우회전하는 노면전차 창가로 비추고 그렇게 좌석버스나 전철을 탈 수 있는 남서중앙 가까이로 가고 있었다. 남서구청과 낮은 상점가, 버스와 나란히 달리는 대로를 달릴 때, 내가 사는 이 곳의 풍경은 모르겠고 그저 우중충한 바깥을 창 너머로 바라볼 뿐이다.

이어폰을 꽂고 주변 소리를 일렉트로니카에 감추고서 이웃 동네로 갈 생각만 하고 이렇게 글이나 쓰며 무료해 하는지 모르겠다. 이게 일기인지 원. 여기에서 좀 더 나가면 종점인 남서중앙역. 버스로 갈아타고 북동으로 향하는 길가를 가만히 바라보며 한숨을 쉰다. 자꾸 당구를 치면 공이 득점의 찬스 때마다 절묘하게 빗나가서는 점수가 먹히니까 이제 이기려면 보이지 않는 보기 대령에게 경례하라는 비아냥으로부터 우스꽝스러운 브라스 곡이 나왔던가 계속 생각하면서 뜬금없이 잘 살고 싶단 열망이 끓어오르다 식어버린다. 그리고 북동구로 가려던 발걸음을 중앙구에서 멈춘다. 버스에서 내려면 잘 꾸며진 쇼핑몰과 온갖 화려한 것들이 보여서 왜 저것들은 내 것이 아닌가 하는 열등감을 느껴본다. 역시 나는 저것들 무리에 낄 수 없나 하며 난감해 하는 자신을 스스로 비웃으면서.

무료한 한 시간동안 화려한 물건을 보고 쇼핑몰을 돌아다니는 것으로 끝내버렸다.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을테니 돌아갈 때도 버스로 바로 갔다. 전철과 전차인지, 메트로와 트램인지는 모르겠고 그냥 그 둘은 도중에 갈아탈 필요없이 한 번에 가주는 버스에 조금 밀린다. 빠르기는 전철이 매우 낫지만 편하기는 버스라서 뭔가 마음이 놓이는 순간, 버스는 비록 노면전차 정류장이지만 버스가 서도 아무 문제가 없는 정류장에 멈춰서서 나를 내려준 버스는 저 멀리 떠나고 나는 집 쪽으로 걸어간다. 그저 있으니 고마울 뿐인 대중교통에 왜 이리도 매료되어 있는지 제멋대로 생각하면서 걸어갔다. 그나저나 '전차는 언젠가 전철로 바뀔 꿈을 꿉니다'라는 홍보물이 붙은 전차 정류장 그 옆에 '전차 가고 도로 오라', '고규격 철도만이 살 길이다'이라는 현수막이 가로수에 걸려있다 구청 직원들에 의해 철거된다.

인생이 늘 그렇다. 늦게 잠들어 한숨도 못 자서 진찰받으러 전철을 탔는데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를 않는 것이 바로 인생. 지금 그런 상황으로 열차는 북동카페거리 정류장에 나를 내려줬다. 아무리 춥고 덥지는 않지만, 매캐하지도 맑지도 않아라면서도 외칠 수 있지만 내가 외치지 못하는 이유는 전철이 내가 가려는 방향으로 가지 않아서라고 흥얼거리며 나리네 가게를 찾았다. 가게 이름 알려달라고 문자 보내니까 알려준 카페 이름이 'Nesto de pigo'라니, 특이한 이름이야 하며. 에스페란토로 '까치의 둥지'를 뜻하는 카페를 찾아가며 까치가 반짝이는 물건을 둥지로 가져가듯이 반짝이는 재료가 딱딱한 과자 위에 올라간 음식을 생각했다. 말 그대로 온갖 타르트를 파는 카페에 도착했고 길 잃었던 그 때의 친절한 소녀가 비눗방울이 얼굴 가까이에서 터져버렸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소녀는 당황하면서 돈은 안 받을거라 말하면서도 내 주문을 받는데 그래도 염치가 있지, 실업수당이 들어오는 체크카드를 내밀었다. 그러자 카드 리더가 망가졌다고 나에게 카드를 돌려주는 나리. 그저 자리에 앉아 커피와 타르트가 준비될 때까지 뭔가를 계속 찾는 듯이 두리번두리번. 카페 안은 그다지 북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한산하지도 않았다. 커피와 타르트를 먹으며 공짜로 얻어먹는 것은 싫은데 어쩌면 좋지. 백수라고 흘기는 소리에 잠시 고개를 딴 데로 돌리니 누가 다가오는 소리, 그리고 메모지에 무언가 쓰는 소리가 들린다. 나리가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와서는 '그 때 카페거리에서 길 잃은 저의는 자살이 목적이었나, 한심한 남자놈'이라고 하면서 주소를 적은 메모를 건네준다. 카페협회 쪽의 구인공고라면서도 어떤 상황인지는 상세히 가르쳐 주지를 않아서 그저 커피 다 마시고 일어설 뿐.

오늘도 트램과 메트로를 아울러 오고가는 열차 안에서 오도카니 서서 이어폰에 다른 소리를 막아세우고 역시 내가 아니더라도 좋은 세상을 만들어 줄 존재는 많겠지 하면서 쪽지를 들어 살펴보았다. 남서구 중앙통 남서중앙로 25라면 남서중앙역 근처이기는 한데 내가 사는 해안통에서는 거리가 있어 트램 타고 나와야 하는 동네. 귀찮아서 오늘 중에 들러볼 작정으로 남서중앙역에서 내렸다. 집까지 바로 가는건데 좀 아깝군 하면서 주소에 적힌 남서중앙로 25를 찾으니 이름이 '영점'인 카페. 나름 중심지에 있지만 허름하고 정말 왜 이래. 그래도 들어가본다. 계세요? 일하러 왔습니다만.

어딘가에서 한숨쉬며 누군가가 나온다. '어 하얀 외모에 은빛 옅은 푸른 눈동자는 아니군'이라 할 정도로 버릇이 없진 않은 나는 장사도 이상하게 안 되는 카페에 누가 일하러 찾아오나 싶지만 반갑다며 영점 카페의 주인인 지수와 인사한다. 우선 그렇게 여기에서 일하게 된 것 치고는 빠르겠지만 기본급 협상이나 근무기간 정하고 다음에 뵙죠라고 했다. 음, 나리 녀석이 나에게 엿을 준건가 생각하며 지수한테 장사 할 생각은 있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어느새 나는 모든 사항을 다 결정하고 악수까지 한 뒤에야 물어볼 깡이 생겼는데 그 사이에 지수가 사라져 있었다.

쳇, 이상한 곳이군 하면서 집으로 가는 전차에 올라 답답한 집으로 돌아오면 푸른 요정이 소파 위에 누워 무료한 표정으로 텔레비전을 보고있다가 문득 나를 쳐다보았다. 용건 없으니 그냥 방으로 들어갔고, 의문의 호에에. 그렇게 들어간 방에서 당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냥 바닷소리를 듣다가 폰으로 텔레비전을 보거나 하면 답답해질 뿐이라 거실로 나오니 푸른 요정은 아직도 지루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소파에 누워서 턱을 괴고 텔레비전을 보며 한숨 쉬고 짜증을 낸다. 나가서 연장된 트램을 타고 완전히 남서구를 벗어나기 바로 전에 있는 원예연구소 시험정원에나 가본다.

남서선 트램이 생긴 이유를 생각해보면 동백통 사람들이 싫어질 지경이다. 미여울공원 근처의 원예연구소에서 시험정원까지 새로 개발한 품종의 모종들을 실어나르던 노선이라고 이 나라가 세워질 때부터 있었던 내가 그 사람들에게 말해주면 욕 한 바가지 먹겠지. 트램이 생길 정도로 시험정원이 중요하냐 묻는다면 잘은 모르지만 이 나라에서는 주로 난대기후의 식물을 냉대기후의 하유섬에서도 자랄 수 있게 육종하는 별난 짓을 한단다. 그게 관광 이전에 하유국을 받쳐세우는 산업이라나. 그래서 보통의 냉대기후대 같으면 볼 수도 없는 귤나무가 자란다던가 로즈메리와 차나무가 몇 년째 시험정원 한켠에서 잎을 따서 쓸 수 있을만큼이나 무리없이 튼튼하게 자란다던가 하는 별난 풍경을 볼 수 있다.

형질고르기였나, 유전자변형 금지라고 그런 방식으로 몇 년이고 품종 개발에 매달리는 녀석들 중에는 상록구 출신도 있단 얘기는 분명 그 형질고르기 과정 중에 요정이 껴들어갔다는 소리겠지만 뭐, 어때. 덕분에 하유는 냉대기후에서도 자라는 귤나무나 차나무 품종을 팔면서 겨우 망하지 않게만, 그것도 나 같은 히키니트 백수건달한테 생활지원금까지 쥐어줄 정도로는 망하지 않는 나라다. 겨우 어느 나라 수도의 두 배 정도 되는, 일 년 내내 춥거나 시원해서 더위와 여름이 없는거나 마찬가지인 외딴 섬나라가 그렇다고. 그렇게 아무리 노오력해도 하유섬 기후에서는 얼어죽는 녀석들은 온실에서 자라고 있는데 그것 참 싫네.

잉글리시라벤더 근처에 벤치 하나 있고 내가 앉아있는데 아직 3월 초니까 꽃은 피지 않았지. 좀 걸어들어가면 여기에서 제일 오래 된 녀석인 커다란 차나무가 있는데 연구원들이 와서 가지치기 하는 광경을 멍하니 보는 것도 그냥 가지치기구나 싶으니 지루했다. 마침 노면전차가 회차할 때 나오는 멜로디가 좀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들려온다. 동백통 녀석들이 여기가 종점이었던 남서선을 연장시켜 버린 바람에 이 소리의 횟수가 줄어들고 만 셈이 되었지만 통민회의에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서로 싸울 조짐이 보이니까 그 자리에 끼기 싫어 살짝 바깥으로 내뺀 주제에 할 말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