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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표준시보다 열한 시간이 빠른 시계는 똑닥거렸고 일자리를 얻지 못한 누군가는 하유섬 한 가운데를 걸어다녔다. 전철 타고 쭉 가니 어느샌가 여기에 닿았고 여기서 해안가에서 근처의 집으로 걸어간다 한들, 나라한테 빌린 집. 살고 있는 동네가 바닷가랑 가까워서 언제나 막힐 때마다 바닷가로 가는 멍청한 니트는 남서구 한귀퉁이에 있는, 나라에서 빌려준 집에 살고 있다. 진짜로 나라가 조그마해서 주택을 배급한다고. 그런 입장에서 외람되지만 빨리 일을 해야하는 나의 처지는 한심하다 못해서 짜증난다. 이런 일상이 끝나기를 바라며 '적어도 사랑스러운 일상을 보내고 싶다'고 매일매일 바라는 바보는 집으로 들어갔다. 그나저나 오늘, 내가 타려던 게 몇 시에 온댔었나 하고 좀 더 일찍 일을 잡으러 나갔다면 탈 수 있었을 텐데 하면서 그냥저냥 애매하게 구는 형편이었다.

…라고 나를 딴 사람처럼 생각해서 이야기를 해보면 역시 딴 사람 이야기다 하면서 마음이 편해진다는 말이지. 그렇게 나는 방 안의 침대에 누웠다. 폭신해서 마음에 들지만 한없이 누워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잠들면 모두 잊히는 욕심에 나는 눈을 감고 말지만 다시 한 번이다. 좀 움직이기로 마음먹는다. 잠시 걸음을 멈추게 하는, 집 앞 도로에 깔린 철길 위로 구르는 노면전차가 쇠 갈리는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노면전차를 하유섬 이곳저곳으로 보내겠다는 하유국 내각의 발표가 얼마 전에 있었다는데 하필 자동차 도로에 놓인 철길을 따라 다니는 전차라니!

이런 곳에서 나가면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내가 원해서 이 조그만 섬나라, 하유에 온 것을 어떡하겠나. 그렇게 무작정 나는 어디로 갔을까. 노면전차를 끝까지 타고 간 공원에서는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서 그저 중얼거리면서 사람들이 '너 이상해'라고 눈치를 줄 만큼이나 미친 짓을 할 뿐이다. 생각은 꼬이고 되는 일은 없어서 힘든 가운데에서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방어이니 하면서 걸어가는데 누가 내 옷자락을 잡는다. 그리고 어떤 새하얀 남자애가 히익하고 놀라서는 도망가는데 모르겠어. 그리고 문득 손에 뭔가 쥐어져 있는 것에 내가 놀라버리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미여울공원을 나와 다시 전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그 남자애가 뭘 줬는지 살펴보면 그냥 여기서 유명한 라벤더 주머니일 뿐이야. 그리고 잘 살펴보니 포스트잇도 붙여져 있고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이런 것을 왜 나에게 줬는지, 설마 놀라서 못 챙겼는지 알기 위해 전화를 걸었는데 걸자마자 히익 후에 전화가 끊겼다. 그리고 이내 같은 번호로 문자가 왔다. 향주머니는 가지고 자기도 남서쪽 해안가에 사니까 친하게 지내자는, 조금은 이해 불가능한 상황이 나에게 찾아오다니.

그렇게 끝나면 좋으련만 전차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던 중, 어깨 위에 뭐가 있는 것 같아 떨어내니 요정…이 떨어진 것 같다. 왠지 가볍게 어라하는 소리가 들려서 뭐가 떨어졌나 살피는 땅바닥을 보는 순간, 여기 왜 이래 하면서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 하니 나를 노려보는 그 푸른 녀석은 뭔가 용건이 있으니까 찾아온거고 자기는 날벌레 아니니까 죽이지는 말라고 일러둔댄다. 내가 생각해도 진짜 이상한 하루야.

그렇게 시간은 흘러, 전차도 뜸해지는 때에 나라에서 빌려준 집의 마당을 하염없이 파다가 집으로 들어가니 자기는 날벌레 아니라고 하던 푸른 요정은 보통의 사람 크기로 커져있었고 왠지 장난스럽게 웃고 있기에 무시했다. 무시당하니까 또 나를 쏘아보는 그 애, 좀 이상하다. 계속 왜 요정을 보고도 왜 소원을 안 빌어, 이 속물아 소원도 없냐, 네놈이 구직활동 제대로 하면 그 꼴도 아니지 하면서 시끄럽게 굴길래 나는 '혼자 살아서 방이 남아. 네 방을 줄테니 가서 닥쳐'라고 웃으며 독설해보자…는 역시 아닌 것 같다. 무시하고 점심 먹으려는데 역시 먹을 것은 삶은 풋콩 뿐. 그저 한숨 쉰다. 푸른 요정은 '한심한 놈아, 한숨 쉴 줄은 아냐' 하니 몰라, 다 던지고 바닷가로 나가버리자. 메리 수, 나는 네 머리 위에 있어. 네놈은 나만 이해할 수 있어 흥얼거리며 문을 열고 집을 나가버린다.

이것은 라노베가 아니다, 그냥 내 머릿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옮기는 작업이다 하면서 나는 무다, 바람이다 하지만 정작 술술 쓰이는 것은 라노베라서 당최 내가 뭔 소리를 하는 것인지, 헛소리인지 개그인지도 모를 그런 순간. 바닷가에서 계속 글을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고 하니 내가 쓰는 글은 결국 라노베가 되어버린 지금이 한심하다. 이런 지리멸렬에 역정내며 현실을 알아버리는 것도 싫어서 계속 도망친 결과는 이러하니 결국 어느 부끄럼쟁이 새하얀 남자애한테 라벤더 주머니를 받지 않나, 어깨 위에서 떨어진 푸른 독설가 요정을 만났지를 않나, 만약 누가 내 이야기를 쓰고 있다면 그 누군가의 모가지를 비틀어서 잠금해제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배경을 부숴버릴테지. 부숴져라, 아악하는 도중에 아침에 들었던 히익하며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와 함께, 갓 중학교 들어갈 나이대로 보이는 새하얀 남자아이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유리빛 옅은 은색 눈동자라면 무슨 생각이 날 듯도 해서 무섭다.

뜬소문이겠지만, 북동구하고 상록구 경계 근방에 인형들이 산다는 것이고 걔네들 특징이 유리빛 옅은 은색 눈동자에 하얀 외모라서 경계하는 것이다. 혹시 몰라. 상록구는 내각에서 그곳에 요정이 사니 사람 살려고 싹 밀었다가는 하유국민이 위험하다고 의원들이 스크리밍을 해대서 숲 속의 작은 마을이 되어버린 경우도 있으니까 이 나라 별나다고. 또한 이런 이상한 섬나라에서 유리빛 옅은 은색 눈동자에 하얀 외모를 가진 이 아이에게 잘못 보였다가는 나도 인형되는 거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려운 그 아이의 표정이 이내 갸웃거리는 동작으로 바뀌고 향주머니 안 돌려줘도 되고 같은 바닷가에 살아서 참 감사해요 하며 나에게 다가왔다. 소문과는 달리 인형이어도 사람을 해치거나 죽이지는 않는다면서 나에게 가까이 와서 손을 내미는 그 아이는 자기 이름을 '봄'이라고 소개했다.

…따뜻한 계절이기는 한데 남자애에게 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는 조형사는 당최 뭔가 생각하기도 전에 옅은 미소를 띄며 내 어깨에 기대서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잠드는데 귀엽다고 해야 하나. 외투 주머니에 넣어둔 향주머니를 꺼내서 향을 맡는다. 봄이라는 인형에게서도 똑같은 라벤더 향기가 나기는 하는데 그래서 그런걸까. 아아 모르겠다. 시간도 늦었고 이제 봄이를 깨우자. 이제 서로서로 집에 돌아가자 하니 가볍게 나를 째려본 후 서서히 아쉬운 표정을 짓는 봄이가 먼저 나를 떠나갔다. 그렇게 가볍게 눈을 감고 슬픈 듯이 끄덕이고서 자기 집으로 떠나간 인형소년의 잔상이 너무 심했다. 라벤더 향기에 실려온, 우울하지만 다시 한 번 마주치고 싶은 기적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