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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문/하유 배경의 이야기

하필이면

두번의 봄 2021. 11. 20. 19:32

겨울이라 일도 없고 심지어는 심심해지는 농한기가 찾아왔다. 차에 기름 넣으러 들어간 주유소에서 다른 나라는 연료합성에 관심도 없는 모양이라며 신문을 보다 나랑 눈 마주쳐서 무안해 하는 주유소 주인과 주유기가 탁 걸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조금씩 민물은 얼기 시작하고 바다는 비열차가 커지는 때다. 그렇게 기름값을 내고 낮은 다리를 건너 카페가 많이 들어선 북동쪽의 골목으로 향하는 시간.

어차피 이런 느낌은 자동차세도 아깝고 이렇게 작은 섬나라에서 갈 곳도 없으니 그러는 것이지만 일단 나는 배도 고프고 어느샌가 나라가 정원같다고 놀러오던 사람들도 끊겨 내 돈도 없어지는 형편이라 힘들어서 도저히 운전 말고는 다른 취미를 갖기 힘든 탓도 있으리라. 하지만 조수석에 타고 있는 폭신한 동화풍의 옷을 입은 인형소녀가 삐쳐있다고. 야, 메이. 그렇다고 과수원의 나무를 밑둥쳐서 숯으로 만들자고 하면 안 된다고 했다고 지금 이러는 거니? 그래도 메이는 일이 없으면 만들어야죠 하는 불만 섞인 말을 할 뿐이다. 말 없이 라디오를 켜고 교통정보가 나온다. 동서고속도로와 낮은다리가 동시에 막힌다는 뉴스가 흘러나온… 어 뭐야.

클러치와 브레이크, 중립 기어로 빼는 동작을 반사적으로 하고 비상등을 켠다. 계기반에 머리를 박은 메이에게 미안하다고 했는데 메이가 손을 들어 그럴 필요 없다고 하는 차 안. 어차피 바로 들은 대로 낮은다리에 정체가 이어진다. 이러다가는 배도 고프고 카페고 뭐고 저 해일에 집어삼켜지는 것은 아닌지 불안감이 엄습한다. 풍랑을 주의하라는 얘기까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기에 신경질적으로 라디오를 껐다. 메이, 이 다리에서 빠져나가려면 끝까지 가야 해. 메이는 그렇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되묻고 우리는 카페거리로 안 간다고 알려준다. 싫은 표정을 짓는 인형 소녀를 달래줄 이유는 없어보이고 일단은 이 정체가 풀리기를 빌 뿐.

정체는 그로부터 약 10분이 지속되었다. 그렇게 천천히 낮은다리의 끝단, 라운드어바웃에서 우리는 정체의 원인이 교통섬으로부터 끌려나오는 것을 보았다. 어느 라운드어바웃 통과도 못하는 새끼가 저런 민폐를 끼치냐고 말하기 무섭게 메이는 내 입을 막는 시늉을 하며 일단 돌아가자고 얘기하고 카페거리가 약 20km 남은 지점에서 차를 돌려 농장으로 돌아왔다. 메이에게 미안하다고 했지만 애초에 미안할 일이 아니라고 듣는 대답.

농장에 도착해서는 안 그래도 별로 느낌이 안 좋던 엔진을 좀 살피려고 했다. 여기저기가 새는 느낌이라서 힘들고 짜증나는 가운데 올해 작황도 망해서 어쩌면 죽었을 지도 모르던 나를 어거지로 살게 만드는 소녀 인형이 기지개를 켜며 내 쪽으로 오더니 고개만 갸웃거린다. 하기사 메이는 그저 농장에서 데리고 있을 뿐인 아이라서 물건을 대신 팔아주거나 가게를 맡아주는 정도만 도와줄 뿐이다. 할 일이 없어서 의욕이 없는 것은 메이도 마찬가지였다고. 갑자기 껴안고 우는 것을 보다 못해서 뿌리치고 도망가는 이유가 그거겠지. 내가 생각한 다른 이유가 맞겠지만 구태여 더 생각하지 않을래.

그렇게 하필이면 모든 것이 안 돌아가는 것이 오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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