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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문/잡문

섬과 육지와 방조제

두번의 봄 2015. 8. 30. 12:10
이제야 왔나보네요.
여기에 앉아서 쉬기로 해요.

뭔가 떠오르지 않아
필요없이 짜증을 내기보다
여기 앉아서 박하차를 마셔요.
어차피 여기 안에서는

변하는 것이 전혀 없을거예요.

쉬려고 바깥을 뒤척이던 중에 나는 그냥 여기저기 쏘다니며 전혀 연관성없는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여기서 더 나가면 안산과 시흥의 시경일 것이고 좀 더 걸으면 오이도가 나올 것이고 시화호와 인천광역시 송도국제도시를 향해있는 황해를 사이에 끼고 장장 12.7km의 바닷둑이 있다. 그러니까 시화호는 오래전에는 바다였다. 적어도 그랬다.

안산시 도로의 무법자라는 태화상운 소속의 123번 버스가 방금 바닷둑을 건너갔다. 대부도로 들어가는 그 길을 버스로 들어가는 것이 오늘 처음이다. 그렇게 방조제 위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저 멀리로 보이는 송도국제도시 개발 직전의 순간같은 일종의 희망을 가지고 이곳에 온 사람들이 이 길고 긴 조력발전소를 넘어서 대부도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버스는 과속을 시작했다. 운전기사가 자신이 소속된 회사의 버스는 역시 과속이 생명이라고 굳게 믿고있는 탓일 것이다. 그렇게 버스는 내 오른쪽의 황해로 추락했다.

그렇게 버스가 시화호에 빠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채로 불의의 사고에 휘말린 사람들은 버스 창문을 깨면 수압에 의해서 버스에 물이 더 차오른다는 것을 모르는 듯이 열심히 버스 창문을 깨기 시작했다. 그리고 버스는 송도국제도시에서 배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가라앉았다. 태화상운이 원망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리고 가라앉은 버스의 무게와 수압때문에 버스 유리창이 깨지면서 나는 겨우 바깥으로 헤엄쳐 나갈 수 있었는데 버스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나는 기절해버렸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점점 추워졌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따뜻한 모래톱에 저 멀리 초록빛 풀밭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기상 겨울이기 때문에 '내가 참 재수없게 세상 하직했군'이라는 생각없는 소리를 뱉어냈다. 그리고 나는 이곳을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했는데 불가능했다. 주변에 사람이 있거나 뭔가 연락 수단이 있다면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을텐데하다가 스마트폰을 꺼내보니 그냥 봐도 침수된 것이 분명해서 전원을 켜본다는 것을 그만 두었다. 어쨌든 내가 살아서 어디론가 떠내려온 것이라면 여기는 적어도 어떤 무인도이거나 암초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 날씨는 완연한 봄날같이 폭신하고 따뜻했다.

그렇다. 나는 금방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깨닫고 통곡했다. 나는 아직도 사고현장 근방에서 발견되지도 않은 상태이고 여기는 내 상상이 현실화되어버린 일종의 가상이었다. 그것을 알아버린 이유는 마실 물을 찾으러 가는 길에 매우 하얗고 착한 소녀를 놀라게 해버렸는데 누군지 낯이 익다고 했더니 나의 꿈에 자주 나타나는 매우 순하고 착한 소녀였다. 서로는 서로가 진짜로 만났다며 깜짝 놀라 자빠지고 나는 눈 앞이 아득해지는 고통에 주저앉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나의 상태를 거짓없이 증명해주는 여기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꿈 속에 갇혀버린 나를 위로하는 수 밖에 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란'이라고 하는 그 소녀와 같이 이 섬에 '정말 어쩔 수 없이' 살게 된 이상, 별 수 없게도 나는 그 아이하고만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 그 아이는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며 눈을 살포시 감고 살짝 고개를 끄덕여줬는데 문제는 그것이 끝이다. 내가 그 아이에게 대답을 요구하면 란이는 '꽤나 복잡하고 곤란하네'라고 말하고는 얘기를 마저 끝내달라고 부탁만 할 뿐이다. 그렇게 란이네 집에 얹혀서 란이가 아끼는 풍란을 돌보고 란이가 준비해주는 맛은 있지만 잘 느껴지지는 않는 식사와 이따금씩 밖으로 나와서 춥지도 덥지도 않고 서늘하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이 섬의 햇볕을 쬐며 지루하게 사후세계로 추정되는 이 곳을 즐겼다. 적어도 사후세계가 아니라 진짜 세상이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그렇게 란이의 부탁으로 텃밭의 허브를 둘러보며 박하와 백리향을 모두어서 갖다 줄 생각을 하는 어느 심심한 오후 3시였다. 그렇게 나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나는 이미 죽었고 여기는 기후로 보나 저 여자아이로 보나 분명히 사후세계다'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나는 분명 여기에 의식이 살아있는 채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뭔가 모순 내부의 모순 내부의 모순 내부의 모순 내부의 모순 내부의 모순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란이의 요리를 도와줄 박하잎과 백리향 가지는 요리에 쓰고도 조금 남을 정도로 바구니에 담겼다.

그리고 식사를 하며 란이에게 분명히 물었다. 여기가 어디이고 나는 도대체 죽은건지 살아있는건지를 말이다. 란이는 웃을 뿐인데 도대체 저 아이는 뭘 알고 있는걸까 생각하려하기 무섭게 나를 발견한 그 날에 버스가 바다에 빠지는 것을 멀리서 봤다고 내게 말해주어서 나는 놀랐고 란이는 계속 사심없이 웃어댔는데 의도가 심히 궁금했다. 이어서 란이는 걱정말고 여기 있으라는 말과 함께 식사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란이는 설거지를 하면서 나에게 계속 그 사고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그 말을 짧게 정리하자면 원래 이 섬은 항로에서 많이 벗어나 있어서 아무도 모르는 비밀스럽고 은밀한 곳인데 자기가 인천 쪽에서 넘어와서 살고있던 어느 동안에 버스사고로 떠내려온 나를 해안가까지 끌고와서 섬에서 가장 햇볕이 잘 드는 풀밭에서 말 그대로 '뽀송뽀송하게 말리려고' 했단다. 그러다가 내가 깨어나서 물가를 향해 걸어가는 동안 서로 마주친 우리 둘은 '꿈에서나 만나는 아이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서로의 눈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놀라 자빠졌고 그렇게 우리 둘, 서로가 어디에서 자주 봤던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은 우리가 꿈에서 자주 만나는 사이인 탓이었던 것이다.

고양이하고 토끼가 이 섬에 살고있다는 란이의 말에 나는 매우 기분이 좋아졌는데 역시나 다음 날 아침에 풀밭에서 햇빛을 쬐는 고양이를 만났다. 기분이 좋은지 야옹거리면서 내가 옆에서 쓰다듬는 것도 모르는 듯이 기분좋게 눈을 감고 가르릉거리며 해바라기를 하는 고양이조차도 이 곳에서는 매우 특별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럴 것도 없었다. 이 쪽 근해에는 뭔가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여기가 어느 시도의 관할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이 나를 서류상으로 죽여버렸을 줄이야.

뭔가 이곳에 오래있으면 현실감각을 잃어버릴 것 같아서 란이와 함께 근처 방아머리 선착장까지 가는 낚시배를 얻어타고 오랫만에 안산으로 나간다. 그런데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란이에게 뭔가 물어보려다 그만 두었다. 그리고 근처를 지나가는 자동차를 잡아타고 안산시청으로 향했다. 그곳이 안산의 중심이니까. 그렇게 안산시청에서 내린 우리는 한동안 멀뚱히 서있다가 내가 먼저 민원실에 들어가 번호표를 뽑고 궁금했던 나의 생사여부처리를 조회했는데…죽었다고 떴다. 뭐야싶어서 다시 확인해봐도 죽은 사람이라고 서류가 말해주었다. 나는 이것이 잘못된 모양이라고 수정요청을 했고 나는 그 죽었다고 처리된 사람이 내가 맞다는 증명을 20분 넘게 하고 나서야 사망처리가 무마되었다. 휴.

란이는 민원실에 볼 일이 없는 듯 했다. 그리고 스마트폰이 물에 젖어서 안 켜지는 것 때문에 서비스센터도 들려보았건만 폰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냥 방전이라고만 설명했고 나는 바닷물에 빠졌었다고 설명했는데 수리기사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쪽 관련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은 그것 뿐만이 아니어서 우선 잘만 작동되는 휴대전화로 가족에게 전화를 걸었다. 놀라면서 어디 있냐고 묻는다. 그런데 나는 가족에게 안 돌아간다고 말하고 내가 있는 곳을 가르쳐주지도 않았다. 전화를 어렵게 끊고 란이에게 볼 일 다 봤으면 돌아가자고 말했다.

그렇게 란이의 섬으로 돌아가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스마트폰의 GPS를 이용해 이 섬의 좌표와 대략적인 위치를 알아낸 것이다. 그리고 내 궁금증은 한 번에 해결되었다. 이 섬은 인천광역시 연수구와 경기도 화성시 사이에 위치한 조그만 섬일 뿐이었다. 그런데 시화호에 자주 놀러왔지만 이 곳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기분탓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섬의 행정구역은 여전히 알아내지 못했다. 란이는 웃으면서 나에게 박하차를 대접했는데 별로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지를 않았다. 적어도 그랬다. 시간이 흘러 밤은 깊어갔다. 완전 황당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오늘 하루를 마치며 마지막으로 보고싶지 않은 엄마한테 이 섬의 좌표를 가르쳐주며 만나러 오기만 하고 데리러 오지는 말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그렇게 란이의 섬에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나는 지내고 있었지만 가족들은 내가 사실상 납치된 입장이라고 생각했나보다. 내 휴대전화가 멀쩡한 것이 그렇게 원망스러운 적은 없었는데 가족이라는 이름의 훼방꾼들이 내 휴대전화 기록에 찍힌 GPS 기록을 밟고서 란이의 섬에 들이닥쳤다. 쳐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는 그들을 지켜낼 무기는 프라이팬 정도라서 그들이 갖고 온 '행정관련서류에서 사망처리'라는 무기를 이길 수 없었다. 가족들에게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자 내가 죽었다는 것을 내가 확인한다는 문서에 서명하라는 그들의 의도는 충분히 알 수 있겠다. 어차피 실제 지도에는 찾을 수도 없는 이 섬에 GPS 기록 만으로 쳐들어오다니 끔찍한 굴욕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미 그들에게 이 섬의 좌표를 알려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어떻게 이 섬에 들이닥친 침입자를 쫓아낼지를 생각해내다가 결국 나의 가족에게 굴복하고 끌려가버렸다. 란이에게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곳은 초지1로 78번. 결국 나는 안산 본토로 돌아와서 지겨운 생활을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불안으로 손발이 떨리는데 이제는 도망을 칠 수 있는 형편이 안된다. 방 안에 무기력하게 있으면서 아무것도 바라지도 할려고 하지 않는채로 뭐라도 되어야지하며 중앙역 근처로 걸어나가는 나였다. 적어도 그 근처로 나가면 놀 것이 있으니까 조금씩 발을 떼어 놀러나갔다. 란이하고 둘 만이 살던 섬은 모르겠고 이제 사람들이 너무 많은 여기에 적응해야 한다고 나를 다그치며 1994년 9월이 오기 전까지 수인선 협궤열차를 탈 수 있던, 지금은 철로마저 뜯긴 중앙역 뒷 편의 버려진 승강장에서 란이를 다시 만났다. 여기에 있을 줄 알았다며 찾았다고 해맑게 웃지만 그 아이가 타고 온 태화상운 123번 버스가 더 걱정되는 한 편이었다. 과속으로 달려서 나를 바다에 빠뜨리고 토끼섬에 닿아서 란이와 만나 신기함을 느끼다가 결국에는 다시 일상으로 나를 끌어당긴 그 버스와 같은 노선의 버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