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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동을 걸어본다. 쉽지 않다. 평소에는 걸어다니고 심지어는 자동차세 내라는 편지나 자동차보험 관련한 통보가 날아올 때면 참 괴롭다니까. 오늘도 역시 자동차세 아까워서 차를 모는 형편이다. 그렇게 12 CE 2872 번호판을 단 은빛의 2008년식 다치아 로간에 시동을 건다. 인젝션 엔진이 왜 이렇게 카뷰레터스럽게 움직이는지 모르겠다. 겨우 주차장을 나와서 제일 먼저 향한 주유소에서 기름을 가득 채우고 갑자기 쓰레기 처리의 대안이라면서 합성공정을 더 빡세게 굴리는지 더 저렴해진 자동차 연료 가격이 이래도 괜찮은가 수준이라 조금은 의심을 가지며 계산 끝내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고.

그렇게 달리는 간선도로는 막히지 않고 단순하다 못해서 투박하게도 느껴지는 B세그먼트의 루마니아제 싸구려 차는 시속 78 킬로미터로 남서구를 벗어나고 있었다. 은근히 과속성향인 흐름이 좀 짜증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긴 하지만 뭐 어떠랴. 나는 목적지 없이 자동차세 아까워서 조그만 차를 타고 떠도는 중인 것을. 이유 없이 고속도로에 올라가서 그저 달리고 달리는 것에 의미를 두는 이동, 심지어는 그게 어떤 식으로 이러하다로 떨어지지 않는 행위. 그저 모두가 수줍고 상냥한 작은 섬나라에 살면서 최소한의 돈만 가지고 재산이랍시고는 기본소득과 은빛 다치아 로간 정도뿐인 한심함에 엔진 소리에 덴트가 생기겠지만 일단 상록숲을 통과하기로 한다. 어느새 Por Ĉiamverdo라는 나가는 곳 표지판이 가까워진다. 숄더체크 하고 우측 방향지시등을 켜고 200m 앞부터 진출한다.

오늘은 요정들이 잠잠하다. 아무래도 정말로 쓰레기 처리를 위해서 합성연료 공급량을 늘린 것이 맞긴 한 듯이. 그리고 가로변에 종소리를 울리며 내 차를 앞질러가는 전차와 구태여 내 차를 향해서 손을 흔들어주는 민속풍의 옷을 입은 누군가에게 간단히 고개를 까닥여주자. 그냥 어중이떠중이처럼 분장하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진짜 이 숲 속에서 내연차를 몰다가 재수 없으면 진짜 요정들에게 돌을 맞으니까. 그렇게 숲 속으로 들어가면 하나의 구라고는 말할 수도 없는 숲과 드문드문 존재하는 마을이 있을 뿐이다. 여울오름은 왼쪽이고 북동구 방면은 오른쪽. 그 중에서 오른쪽으로 향한다. 매달 나가면서 내 생활에까지 지장을 주고 있는 자동차세마저도 아까운데 자동차에 덴트 생기면 고칠 각오가 안 되어 있거든. 그렇게 여울오름에서 내려오던 물이 갈라져서 동쪽으로 흘러가는 좁은 여울 밑으로 난 길을 지나면서 물을 튀기면 거기서부터 북동구가 시작된다.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마침 카페거리가 가깝기에 세우기로 한다. 오늘 나와서 처음으로 시동이라는 것을 꺼보는군. 그렇게 카페에서 간단한 샌드위치와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이제 또 집으로 돌아가야 하네마네 아쉬운 척은 다한다. 문제는 자동차세가 아까워서 어차피 필요하기는 한 자동차를 억지로 떠앉고 있는 것에 불과한 상황이 싫은 건지 아니면 그냥 돌아가는 길에 제발 기름이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내용인지는 그 무엇도 모른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돌아가는 길에 오른다. 시동이 걸리며 순환도로를 따라 이따금씩 바다에 잠기는 낮은다리를 건너 남동구를 지나 집이 있는 남서해안에 도착하겠지. 그러면서 서로서로 먼저 가려는 듯이 양보도 해주는 요상한 길 위에서 그저 자동차세 아까워 자동차를 타는 것이 아니고 뭔가 나도 어울리면서 다니는 그 느낌을 그리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면서 어느새 도착지에 다다르는 것이었다. 후면으로 주차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까지 오늘의 여정이 그냥 자동차로 하는 산책 이외에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서 집으로 들어가보니 자동차세 고지서가 와있었다. 소형차 기준으로 하면 내 기본소득이 다 갈려들어가는 비용에 자동차보험, 연료값을 포함하면 내게 남는 것이 즐거움 이외에 있나 싶을 정도로 슬픈 기분이 들지만 그래도 즐거움이 남는다. 12 CE 2872 번호판이 아무래도 말소될 날이 좀 멀어진 듯하다. 다만 내가 일을 구할 수 있어야 기본소득으로 살아가는 지금의 비참한 기분이 사라질테고 언젠가 그런 날이 오려니 하며 살기에는 좀 가망이 없다. 즐거움은 언제나 괴로운 것이 따라오는 이상한 것이라 느끼며 오늘 하루를 허비한 기분에 갑자기 외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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