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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문/하유 배경의 이야기

채집

두번의 봄 2019. 9. 30. 14:24
별난 숲이 하유섬에 있지요. 하유국 건국초기에 많은 도움을 준 요정들이 사는 곳이라 개발이 엄격하게 제한된 상록숲이 그래요. 이 곳 때문에 하유국은 화석연료를 포기하고 합성연료와 바이오연료를 선택했고 공장 대신에 정원이 되기로 선택했다고요. 내가 그런 숲에 산다는 것도 어쩌면 축복일지 모른다며 오늘도 숲 속의 약초나 야채를 수확하러 가요.

숲 속에 정해진 길을 따라 모든 움직이는 것들이 달리는데 숲의 입구까지 타고 온 전차삯이 미묘하게 올라서 얼마나 많은 야채를 캐야 그 정도를 벌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하고 그런 와중에 엄청 맛있는 녀석을 찾아서 바구니에 넣고 숲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에게 손도 흔들어주지요. 가을은 찾아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이 때 나오는 약초나 야채도 그다지 종류가 많지는 않아요. 나뭇잎이라면 단풍잎을 따다가 살짝 튀겨먹을 수 있고 버섯이라면 독버섯이 있으니까 그것만 조심해서 먹을 수 있는 녀석으로 수확해 살짝 볶아먹으면 맛있어요. 동료들을 만나면 어느 것이 지금 제일 맛있고 어느 것이 독버섯인지 물어봐야 겠지만요. 나무열매도 감이나 도토리가 익어가는 시절이라 땅에 떨어진 것 중에 성한 것을 줍거나 큰 나무장대로 쳐서 떨어뜨리기도 해요. 땅에 떨어진 것들 중에서 구멍이 났거나 속이 비었거나 벌레가 나온 것을 추리면 되는거죠.

바구니는 유감스럽게도 꽉 채우지 못했습니다. 조합의 집하장에 모인 동료들도 요즘 왜 이렇게 안 되나 하면서 도토리와 밤 같은 것들만 잔뜩 가지고 왔더라고요. 아무래도 여기 사는 요정들에게 물어보면 쉽겠지마는 다들 물어보려고 하면 도망칠 만큼 소심해서 문제지요. 이윽고 밴이 하나 집하장으로 들어옵니다. 수입해 온 온갖 풀떼기들이겠지. 뭘 어떡하면 좋을까 생각을 하면 남동쪽에서 오는 밀이나 쌀, 북동쪽에서 오는 과일과 재배종 야채들이 그나마 많으니까 안심하자고, 남서쪽의 꽃들도 이제 겨우 판로가 생겼다면서 도토리는 알아서 팔자 수준으로 정해졌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며 제 값을 못 받게 생긴 것들이 나를 괴롭히는 상상을 하니 더 이상 채집 일을 하고 싶어지지 않다고 생각이 퍼득 들더라고요. 하지만 먹고 살아야 하고 일을 해야지만 먹고 살 수 있으니까 아무래도 저는 글러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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