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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다 수확되어서 3월을 기다리는 사탕무밭에는 공허함이 감돌았다. 눈이 많이 내리고 춥기까지 하면 서있는 것 정도여도 고역일 정도지만 구태여 찾아왔는데 갑자기 떠나긴 그래서 차로 가기를 망설인다. 그러다가 몇십 분이 더 지나서야 추워서 견딜 수 없게된 나는 차에 시동을 건다. 설탕공장을 나가서 숲으로 된 하나의 행정구역을 지나 고속도로로 빠지는 풍경이 이 나라에는 풍경 외에 보여줄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긴 군대도 없고 대규모 공장도 하나뿐이고 사람들은 애매하고 순진하다. 그것으로 됐다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하유섬이라 어쩔 수 없다.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이 섬에 살게 되는거지.

남서쪽 바닷가 근처의 임대주택단지에 다다르면 나는 근처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트램과 자전거, 자동차가 한데 엉켜 다니는 듯한, 그렇지만 서로의 영역을 방해하거나 넘어가지 않는 묘한 질서의 거리를 걸어 집에 도착한다. 요새는 하는 일에서도 잘렸고 기본소득이나 받으며 살아가다가 다시 일자리를 찾게 되겠지. 그리고 외국인들은 기껏 찾아와서는 하유 사람들이 요정같이 보인다며 머리가 아픈 듯이 굴고 왜 여기는 공장이 없느냐는 말에 사람들이 꽃과 정원을 좋아해서 그렇다고 하면 비웃는 지경이라니, 여기에서 살아가기 위한 조건은 더 말해서 무엇하나 싶다.

애초에 맛이 가던 세상에 실망해서 넘어온 사람들과 맛이 가버린 세상에 맞춰서 같이 맛이 가버린 사람들의 신경싸움이 안 멈추는 이상에는 하유 사람들을 외국인 입장에서 이해할 수도 없겠지 하면서 차를 내린다. 찻잔에 돌설탕을 하나 넣고 찻물을 붓자 귀여운 소리가 나면서 설탕이 녹는다. 이 과정에서 마음이 녹아내린다는 비유를 알아들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하유섬에 살겠다고 할 수 있겠는지 하는 생각을 하며 밖을 쳐다보는데 오늘따라 파도가 높게 치는구나. 바다를 향해 나있는 창을 다 걸어잠그고 공영주차장에서 차를 빼온다. 하지만 하얀 마녀가 스쿠터를 타고 내려오던 나에게 해일을 경고했던 그 때처럼은 아닌 것 같으니 차는 예열했다 치고 다시 공영주차장으로 들어가지. 기본소득을 다 털어야 유지되는 자동차 따위는 팔아버릴까 생각도 하지만 하유국 철도가 그렇게 구석구석 있는 것도 아니고 버스는 여기저기 많이 다니며 스쿠터는 날씨에 취약하니 자동차는 필요한 물건이라서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주차장에 들어가기 앞서서 주유소에서 기름 넣다가 또 생각이 든다.

역시 하유 사람들이 밖에서 보기에는 별난 것이 화석연료 싫다고 합성연료만 쓰다가 어느 가리비 회사의 미움을 받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고 꽃과 모종을 수출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데다 하유산 농산물을 사가는 수입업자들은 죄다 품질을 낮게 치려고 안간힘을 쓰며 하유 사람의 정성을 무시한다. 아니, 합성연료 기술도 외국에서 들여왔기에 촉매라던지 생쓰레기 처리라던지 탄소포집이라던지를 배우고 돈으로 갚기에 앞서서 우리 생산품인 농산물과 꽃과 모종을 사가라는 것이 그렇게 아니꼽고 하유에 대규모 콤비나트라도 짓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하겠지만 일단 그건 하유 사람들 대부분이 싫어하고 내각도 싫어하고 억지로 밀어붙였다가는 군대 창설을 말하던 때와 같이 내각이 불탈지도 모를 노릇이다. 이렇게 고개를 저으면서 너무 사람들이 자기만 생각한다고 짜증날 즈음, 주유건에서 탁하는 소리가 났다. 돌아갈 시간이다.

집에서 텔레비전을 틀면 오늘은 너울이 쳐서 배는 묶어두라는 일기예보 속 목소리와 고옥탄 합성 휘발유 광고가 흘러나온다. 채널을 바꾸면 요리하는 방법이 흘러나오고 세 사람이 둘러앉아 말 없이 티타임을 갖는 장면이 나온다. 하유에서 언제라도 마주치는 지겨운 일들. 하지만 이 즐거운 지겨움을 동화 속 이야기로만 여기고 하유국민을 현실성 떨어지는 요정들이라고 비하하는 바깥의 이야기는 듣기 싫어졌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