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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데 있어서 내가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이 있다면 '즉흥성'이다. 고민없이 써내려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글이 짜임새가 있는지 모르겠거나 하면 나는 그냥 글쓰기를 멈추고 밖으로 나가 철도나 버스를 접한다.

경부선 ITX-청춘의 차창과 경춘선 ITX-청춘의 차창은 다르다. 경부선의 차창은 논밭과 공사판을 따라 간다면 경춘선의 차창은 산과 댐, 그리고 터널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두 노선에서 다니는 ITX-청춘 2층객차 윗층에 타본 경험이 있는 나는 정확히 경춘선 차창을 보며 "춘천 가는 기차"의 악상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님을 확신했다. 다만 그 노래가 나오던 1989년의 경춘선은 지금의 광운대역인 성북역 출발이었고 지금보다 터널의 비중이 적었다. 물론 그래서 풍경이 완전히 변해버린 것만도 아니지마는.

하지만 이 즉흥성이 작곡이나 그림을 그리는 데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음이 튀거나 색채가 맞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을 해보면 알 수만 없게 된다. 이런 연유로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오해를 낳고 의미가 흐려지기 쉬운 것을 다루고 있다. 물론 이런 글을 작곡가나 화가가 본다면 나를 인적 드문 숲에 매달아 죽이겠지. 누구나 그 나름대로의 표현방법이 있고 그에 탁월하겠지만, 나는 글을 잘 쓴다는 자각도 없고 그저 머릿속의 구상을 옮겨적을 뿐이라 일종의 일기 혹은 보고서를 항상 쓴다는데 환멸을 느낄 뿐이다.

이런 식으로 내가 글을 쓰면 아무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 나는 마치 내 우울증이 갈 데까지 간 양으로 더욱 더 나를 표현하려 든다. 그래서 상상 속의 내가 팽창해 온실 속 하얀 인형과 정원으로 꾸며진 섬, 화사하고 예쁜 온실을 꿈꿨는지도. 하지만 그 이상은 어찌보면 나를 괴롭게 하고 이룰 수 없는 것으로 변해버려 오히려 상상이 실제를 쥐어짜 괴롭히는 역접의 상황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내 글을 보아주는 그 모두들을 나는 감사히 생각하고 있지만 그들이 내 글을 보았는지 알 턱이 없으니 오늘도 집착하다 눈이 죽을 수밖에.

하지만 내가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내가 좋아하는 운송수단에 갈렸을 가능성도 있고 또는 내 목에 매듭을 걸고 천장장식이 되거나 스스로 수장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오늘도 나는 속으로 매듭을 묶고 철길에 뛰어들고 물 속을 헤엄치는데 이제는 누군가 나를 보아줬으면 한다.

자, 나를 보자. 오만하고 관철하기 좋아하는 남자가 보인다면 겉만 본 것이고 그 속에서 웅크리고 울고 있는 하얀 소년을 봤다해도 겉만 본 것이다. 내가 옮기는 생각 속에, 그리고 글 속에 진짜 내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글을 써야 한다는 의무감에 피로가 쌓이는데도 이렇게 꼬박꼬박 글을 쓰는 내가 어찌보면 대견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다.

적어도 나는 학공치가 되기는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