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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함은 언제나 그렇듯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지루해서 출퇴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따금씩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언덕으로 가거나 전철에 기대어 너른 사탕무밭이나 숲 속으로 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만큼이나 평온하고 집에서 메이드 놀이를 계속하는 루미와 계속 마당에 찾아오는 하얀 냥이와 장난치며 자동차는 잘 있냐면서 놀리는 앨리, 어째서 요새는 차를 잘 안 몰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공영주차장 경비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전부다. 이제 그 모든 설정이나 요소의 틀에서 벗어나 꽤 자유롭게 움직이는 소설 속 주인공이 된 상상도 해보고 유령에게 푸딩을 요구당하거나 일종의 인형이 되어 주인님에게 사랑받다 버려지는 상상에 빠지고는 에스프레소 머신에 손을 델 뻔했다. 그리고 나리는 조심하라면서도 혀를 찬다.
출근은 자동차가 없던 때부터 구태여 복잡해져서 타지 않는 지금까지 전철로 하고 퇴근도 역시 그렇다. 철도선을 달리다가 궤도선으로 들어가 노면전차로 움직이면 그 때로부터 두 정류장 뒤에 즐거운 나의 집이 있다. 피곤하면 쉬는거고 벌이가 안 좋으면 없는대로 사는게 낫다. 하지만 그 이외의 것들이 문제라면 모르겠어. 그렇게 마을 한바퀴를 산책한다. 결국에는 지쳐서 버스를 타고 돌아올 뿐인 그으런 나날들이야. 북서쪽의 블루크루드 공장과 설탕공장은 정상 가동 중이라는 보도와 함께 결국에는 공장이 하나 더 생긴 셈이라고 시위하는 부류가 있는 평화로운 보도가 흘러나오는 텔레비전을 끄고 가만히 포옥 나를 안아주는 루미와 그게 귀찮아서 싫은 소리를 내는 나. 오늘은 반대의 상황이구나 하면서도 이게 뭐냐 싶은 삶이다. 폰은 갑자기 벽돌이 되어서 겨우 복구했더니 파일을 반쯤 날려버렸고 그 때문에 언짢아지는 하루라니. 그리고 천천히 차를 몰아볼까 했는데 앞 범퍼가 살짝 긁힌 꼴이라니. 천천히 북서쪽으로 차를 몰아 하유제당의 공장지대로 들어가면 널리 뻗어있는 밭이 나오고 나는 내 피칸토로 런치 스타트를 연습한다. 액셀을 밟아 3700RPM 즈음에 회전수를 맞추고 클러치를 떼어 튀어나간다. 그리고 급감속할 뿐. 블루크루드와 바이오메탄 생산구역까지 도착하고는 기름 게이지를 잠시 확인한다. 여기서 충전이 된다면 좋겠어.
멍하게 있다가 커피 머신에 손을 델 뻔한 나날만 이어지며 그저 그런 하루들이 지나간다. 인형 마녀 앨리는 이제 나리랑 오해 풀고 친한 친구가 되었지만 아직도 북동쪽 괴담을 믿는 부류는 많아서 글쎄지만. 어쨌든지 일을 하는 것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일하지 않으면 돈을 못 벌고 돈을 못 벌면 또 주택공사에서 나를 집에 가둬서 죽일 수도 있으니 그걸 위해서라도 열심히 일해야 한다. 굶어죽지 않을 정도만 벌어서 겨우겨우 살아가는 일생이고 아무하고도 친하게 지내지 못하는 아름다운 섬에서의 일상이라니, 몇몇 사람들은 나에게 돈 줄테니 하유국 영주권을 팔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는 안 팔아. 적어도 여기니까 내가 이렇게 살 수 있는거야.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살려고 하면 게으름뱅이라 그러거나 일자리 주는 사람들에게 멱살 잡히고 따귀나 맞으며 일이라는 일은 전부 내 몫이 아니라고 가르쳐 준다고. 적어도 하유섬이라 가능한 일들이고. 일을 한 건지 만 건지 하면서 퇴근 후, 남북간선도로를 달려 남서쪽 해안가의 공영주차장에 도착하기 까지 앞으로 15분. 그리고 탈세 때문에 징역을 받고 교도소가 없는 이 나라에서 여권 정지먹은 뒤에 다른 나라 교도소에 갇혀있는 주인장의 카페가 나오면 우회전, 그리고 남서중앙에서 잠시 차를 세우자. 전화가 와서 말이야. 여보세요 다음에 히익하고 전화를 끊는 것을 보아 다음 정황상 문자가 올 것이다. 봄이가 '남서중앙에 있는데, 거기 있어요?'라고 보낸 문자에 긍정의 답변을 보낸다. 그런데 봄이가 내 차를 알까.
봄이는 앨리스 블루색 경차인 내 차를 잘 찾아왔다.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메고 가만히 무릎에 손을 다소곳이 올리고 눈을 감는다. 차에 타면 항상 자더라고. 볼을 쿡 찔러서 안 자도 좋다고 눈을 뜨고 있어달라고 하자 얼굴을 붉히는 봄이. 아 미안해. 그냥 눈만 뜨고 있어 줘. 그리고 남서중앙을 한바퀴 돌고 온통 초록빛이 가득한 여름의 들판으로 차를 몰았다. 시내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이렇게 푸릇한 하유가 마음에 들었더랬지. 봄이는 마치 자기가 인형이라는 사실을 부정당한 듯이 인형처럼 다소곳하게 앉아있기만 했고 그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져서 잠시 차를 세우고 봄이의 은빛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궁금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봄이와 매우 보드랍고 폭신한 봄이 머리카락이 마음을 녹게 만들어서 잠시 이 풀밭에 내려서 간식 먹을까 하고 물어보니 봄이는 고개를 저어. 가벼운 침묵과 한숨 끝에 남서 해안가로 돌아와 오늘은 즐거웠다고 말하는 심약한 소년인형과 헤어지고 그저 뭐냐, 자동차 연료 게이지가 0에 가깝게 변해가고 있어서 충전소에 들렀다. 충전소에 들러서 셀프 충전을 준비하던 중에 쓸 데없이 귀여운 하얀 피아트에 휘발유를 넣고 있는 앨리를 보았다. 안녕, 앨리. 너도 차를 몰긴 하는구나. 그랬더니 살짝 얼굴을 찡그리고 어제 산 차라고, 휘발유 넣는 것을 보면 감이 안 오냐고 하네. 그렇긴 하지. 하유는 블루 크루드 도입하고서야 블루 크루드인가 뭔가로 만든 것만 쓰는 조건으로 휘발유랑 디젤 풀었잖아. 앨리는 용건 없으면 서로 각자 할 일을 하자고 하는데 뭐야, 그냥 신기해. 그런 대화 와중에 나는 CNG인 내 차에 LPG를 넣을 뻔했지만 코크가 잘 안 들어간다는 것으로 알아차려서 너무 다행이었다.
그렇게 빠져나와서는 다시 공영주차장에 차 세우고 집으로 들어간다. 피곤해서 바로 소파에 누워 곯아떨어지는 나를 걱정하는 푸른 요정 메이드와 아무 일 없이 자고 싶은 내가 집 안에 있었다. 트램이 집 앞을 지나가고 나는 멀뚱히 그 광경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도 그저 피식 웃다가도 울어버렸다. 그냥 하루하루가 찝찝해서 다시 출근하고 손님이 없는 카페를 지키고 자동차로 막히는 도로를 참아내거나 만차 수준의 전철과 버스를 참아내야만 하는 그런 일상은 짜증나고 한스러울 뿐이다. 전철이 보여주는 사랑스러운 하유의 정원같은 풍경이 뭔가 싶을 정도로 모두가 싫어지고 하는 기분은 역시 살의려나 하면서 철도선이 끝나는 남서중앙역의 전 역에서 내려 기분을 떨쳐버리려 노력했다. 그리고 기분은 역시 떨쳐지지 못했고 나는 나를 실컷 싫어하면서까지 집으로 걸어와 루미가 걱정할 정도의 이상행동을 보인 모양이다. 일을 좀 쉬고 싶다고 나리에게 연락하니 쉬고 싶을 때 쉬라고 해주었네. 고마워라. 마음껏 쉬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나는 무작정 정류장에서 관문섬 방향으로 가는 전철에 올라 점심은 그곳에서 먹을 생각을 하고만 있었다.
근사한 디저트와 노면전차, 정원과 우울함. 그것을 안고서 마주친 자동인형 친구. 하지만 서로가 달콤한 것을 먹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아. 그런 가운데에서도 근사함은 피어나지만 금세 그 기운을 잃어버리는 성 싶었다. 봄이는 관문섬에는 이따금씩 오고 있으니까 길 잃을 걱정은 말라고 말하지만 역시 걱정된다. 외국에서 오는 인간들 중에는 하유국 국민성을 전혀 이해 못하는 녀석들 많거든. 그러자 끄덕이며 창 밖을 가리킨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구나. 비를 맞고 역으로 뛰어가는 대로변의 궤도공사와 이내 역에 도착하는 시험정원행 전철이 오늘은 빗속을 뚫고 달린다. 해저터널을 벗어나와 바닷가와 도로를 끼고 달리다가 바로 남서해안주택단지에 도착한다. 카드를 찍고 내리면 오늘의 방황은 끝. 마당에는 오랜만에 보는 하얀 고양이와 대문을 열면 상냥하게 어서오세요 주인님이라 메이드 놀이를 멈추지 않는 푸른 요정 루미가 있다. 길 건너 시험정원의 라벤더와 해안가 모래사장의 해당화 향기가 섞여서 향기로운 가운데, 루미의 가호로 좋은 꿈을 꾸었다. 마치 모두가 나에게 도움을 받아서 고맙다고 박수쳐주는 꿈이었는데 그 이후에 나는 눈을 살짝 감고 관짝에 누워 잠든 내 모습을 보았지. 하지만 오히려 그걸 보고 마음은 편해지고 말았지.
전철 자리에 앉아 자동차들과 같이 달리는 구간을 벗어나 전용구간으로 들어간 열차가 보여주는 분주하고도 정원같은 이 나라의 풍경을 땅 위와 고가, 지하로 바라보면서 숲 속을 달려나오면 바로 두세 정류장 다음이 내 일터가 있는 곳. 그곳에서 어서오라고, 일할 준비는 다 해놓으라며 요즘은 자동차로 출근하지 않는 모양이라고 하는데 글쎄, 그건 내 마음에 달려있는 문제이고. 역시 오늘도 사람들은 잘 오지 않지만 그것 나름대로의 즐거움이 있어서 돈 벌며 하루를 허비하는 것이지. 집에 도착하면 공영주차장에 들러 친애하는 피칸토와 2CV와 미니의 먼지를 떨고 집에 돌아와 루미가 어쩌면 좋을까요 하는 소리를 듣는다. 먹을 것이 떨어졌구나 하는 말에 끄덕이는 루미를 공영주차장까지 데리고 가서 2CV에 태우고 시장을 보러 가는데 시큰둥한 루미와 순간 일어나는 스톨. 그리고 시장이 아니라 마트로 가서 고기보다는 야채를 사고 돌아오는 길에 얼마나 썼냐고 묻는 루미는 계속 시옷 자 입을 하고 잘 됐어요, 그 정도 쓸 줄 알면 하면서 시큰둥해 했다. 일단은 집 앞까지 가서 루미와 장 본 물건을 내려놓고 나는 남동구 초입을 찍고 자동차를 돌려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지. 그리고 야채를 손질하는 루미한테 그냥 내가 하겠다고 했다가 싫은 소리를 오랫만에 듣고 그저 기다리는 저녁시간이었다. 맛이 좋은 야채스튜 정도라고 할 수 없는 맛있는 음식과 항상 시무룩해서 내일 자살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본질은 메이드 놀이를 하며 나를 도우려드는 우울 요정일 뿐이다.
오늘은 자동차로 출근. 피칸토가 블루 크루드에 약간 부조를 일으키는 느낌만 아니라면 도로도 막히지 않고 상록숲을 가로지르는 길은 쾌적했다. 엔진 부조 문제도 약간 덜덜거린다 싶은 느낌이라 CNG로 바꾸면 해결되는 문제. 그렇게 네스토 데 피고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리에게 인사한다. 머신을 점검하고 스팀을 뽑아보고 처음 나오는 커피는 주인장과 함께 나눠마시며 서늘한 여름이 특징인 하유섬의 북동쪽 끝자락, 아무도 잘 찾지는 않지만 단골이 없지는 않는 숲 바로 옆의 카페거리는 깨어나며 서서히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한다. 네스토 데 피고는 그 중에서 일직 여는 편이기도 하고 나는 남서쪽에서 북동쪽까지 알바하러 와야 하기 때문에 꽤 일찍 열기도 일찍 여는 편. 이런 얘기로 시작하는 매일이 평범하다 하면 평범한 매일이지만 그게 나리와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등공신이라면 어찌해야 할까 하다가 나리가 화난 얼굴로 째려보는 것을 보았다. 커피 내리자. 그리고 오지도 않는 손님을 기다리면 북서쪽에서 넘어오는 공장 쪽의 사람이거나 숲을 벗어나서 길을 물어보는 사람들 뿐이다. 길을 물어보면 버스나 트램을 타라고 가르쳐 주고 커피를 사주면 고마워하는 그런 형편인데 그렇게 일을 해봤자 나리는 나를 안쓰럽게만 보는 형편이다. 그리고 오늘은 나리가 나를 불러 조금은 사적인 긴 대화를 하자고 하는데 너무 긴 대화가 아니기를 빌며.
나리는 그렇게 아무도 오지 않는 카페에서 덧없는 표정으로 내 손을 꼭 쥐며 마치 일상이 없는 사람 같다는 이야기로 시작해 도대체 왜 그렇게 외롭게 살고 싶어하는 것인지 물었다. 나는 지금 하유섬에 있다. 모두들 서로를 잘 헤아려주지. 다른 나라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상냥함, 그것에 둘러싸여 혼자 살 수 있는 장소라서 여기에 온거야. 그 밖에 이유는 없다.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니 나리는 갑자기 나를 걱정하는 표정으로 변하며 제발 집에만 처박히면 아무 것도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라면서 제발 평범함을 연기하지 말라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나는 그냥 네 카페의 알바생이고 일용직보다 나은 일을 하고 있지만 역시 모르겠어. 삶이 어려워. 나는 겨우 여기에서 삶을 찾았어. 지리멸렬해도 들어 줘. 하유는 근사해. 그래서 나는 여기로 왔지. 하지만 섞으면 흐려지는 물감같은 일상이 너무 싫어. 뭔가를 하면 자꾸만 이야기가 이어지지를 않아. 나리는 금방 표정이 우울해지면서 하유에서도 사람들을 경계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고 하면서 이제 하려던 이야기를 하겠다고 하며 점차 카페를 정리하려고 한다면서, 일자리는 더 이상 찾아줄 수 없으니 내가 어떻게 해야 하겠다고 하네. 그리고 점차 다가오는 퇴근시간. 피칸토에 시동을 걸며 맑고 투명한 겨울 밤에 별을 바라보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라디오와 소통원활한 고속도로, 앞질러가는 오토바이와 함께 고민이 더욱 쌓여가는 여름날 저녁을 보내고 있었다.
하유에 오기 전에도 경계심이 심하고 사람들의 평범한 대화주제를 잘 몰랐던 나는 그냥 마구 말해버리거나 혹은 중얼거리거나 하는 그런 버릇이 있었고 하유 사람들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기에 금방 고쳤다. 상처받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하유의 국민성 때문인지 서로에게 상냥하고 조심스러운 우울한 사람들이 모여 사니까 여기, 남동의 허브농장에도 세인트존스워트만 많이 팔리는 실정이라며 꽤 괜찮은 것으로 드리겠다며 진심으로 웃는 상인의 말을 무시하면서도 계속 그 주변을 맴돌았다. 자동차로 언덕을 올라가기 전, 근처에 있는 충전소에서 CNG를 채우고 그렇게 맑고 깨끗하게 타오르는 것에 대한 환상을 가져보았다. 맑고 깨끗한 마음씨의 내 친구 소년인형이 떠올라. 그 아이는 참 얌전하고 부끄럼쟁이라 다른 나라에서는 살지 못할 것 같기도 하지. 그렇게 언덕 정상에 차를 세우고 봄이에게 문자를 보내보자. 봄이는 자동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자고 제안한 나의 문자에 아무런 답장을 주지 않았다. 나나 봄이나 너무 공통점이 많지만 순진한 인형소년과 결함이 많은 주제에 오만한 나 따위는 개 발의 편자라고 할 수 있지만. 마치 눈을 마주치면 상대를 돌로 만들어 버리는 소심한 소녀가 방랑벽이 있는 대범한 소년의 설득으로 세상으로 나와 항상 실수하는 자신을 싫어하며 계속해서 세상을 되돌리는 그런 느낌은 아니고 예전부터 괴롭힘을 받아왔기에 자신을 스스로 한심하게 여기고 세상을 저주하는 사근사근한 독설가 느낌이기 때문에 그 아이도 사실은 나를 너무 싫어할지도 몰라.
그렇게 공영주차장 도착. 차를 더 몰고서 어디론가 가고자 했지만 글쎄. 그리고 팔아도 되돌아오는 낡은 두 대와 주로 사용하는 한 대는 경비가 신경을 써줘서 항상 나란히 세울 수 있다는 데에 감사하고 집에 돌아오면 메이드 놀이를 하는 푸른 요정이 어서오라고 인사로 맞아주고 그걸 무시하면 볼을 부풀리며 싫은 소리를 내는 그게 행복이지 하면서 비일상을 일상으로 여기며 살고 있는 듯한 느낌에 헛웃음이 좀 나온다. 인터넷으로 어딘가가 좋을지 검색을 해보기는 하는데 그냥 졸음이 쏟아질 뿐. 그렇게 몽롱한 상태에서 뭔가를 하려고 보면 그냥 곯아떨어져 버린 경우가 너무 많다. 루미가 후에엥거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망친 요리와 난감해하는 루미가 있어서 뭔 일이지 물어보고 요리를 망쳐서 오늘 굶어야 한다고 하는 루미하고 검댕이 어지간히 묻은 주방을 닦고 가만히 있다 과자로 저녁을 때우고 하루가 끝났다. 오늘은 일찍 남서쪽을 떠나 간선도로를 따라 상록숲 근처에서 나와 천천히 차를 몰고 상록숲 속을 달리면 이정표가 가르쳐주는대로 따라가 여울오름을 올랐다. 상록숲 가운데에 강이 솟아오르는 곳으로 천천히 간다. 비가 좀 굳게 내리고 있는 중이지만 그래도 천천히 전조등 켜고 올라가면 될거야. 그리고 증턱쯤 왔을까,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비를 맞고있는 소방사가 차를 돌려 북서쪽으로 가라고 하네.
정상에 뭔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지금 갔다가는 여울오름이 범람할거라 올라오지 않는 편이 좋을거래. 그래서 차를 돌려서 일단 세운 후에 나리에게 전화를 건다. 비가 쌔려붓는다, 어떡하냐. 나리는 말도 마라면서 상록숲에 있으면 나오는게 좋겠다고 왠지 네가 어디 갔는지 알고 있다는 투로 말했다. 천천히 상록숲을 빠져나와 비를 헤치고 북서쪽으로 오니까 비가 보닛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라디오에서는 저지대 침수피해를 막기 위한 수칙을 공용어 네 개로 방송 중이고 최악의 홍수라고 낄낄거리는데 이게 장난같은가. 와이퍼가 물을 밀어내고 하이드로플래닝이 와서 미끄러지는 차랑 이내 네스토 데 피고에 도착해 안으로 뛰어 들어가니 사람들이 조금 많은 것과 나리가 뉴스특보를 보면서 한숨 쉬는 광경을 보았을 뿐이다. 비 그치기 전까지는 여기 있는 수밖에. 축축하고 습하다. 푸른 요정은 이런 비오는 날을 맑고 투명하다고 좋아해서 막 죽기 직전까지 허옇게 질려서는 맑고 투명한 날이라며 오들오들 떨기도 하는데 루미가 걱정되는구나. 비는 여기서 일하다 보면 그치게 되겠지만 이미 비는 꽤 그쳐있고 우산 없이 나갈 수 있는 정도가 되자 따뜻한 커피와 타르트를 먹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가고 나리와 나도 퇴근할 수 있게 되었다. 거의 특근을 했구먼.
집에 돌아오자 루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메이드 놀이에 여념이 없다. 그렇게 돌봐주는 것도 괜찮지만 여튼 나는 귀찮아. 그러니까 그만 두었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좋아. 이제는 여름도 왔겠다 마당에 습기를 좋아하는 수국과 박하를 심어 가꾸려고 하기도 하고 강가를 따라서 걷기도 하고 공영주차장에 세워놓은 자동차를 닦고 바닷가를 산책하고 하는 일상이 계속되는 것인가 하면서 막상 하나도 안 하고 싶어하며 무료해 했다. 그냥 그렇게 멍하게 있다가 또 공영주차장으로 나가서 미니를 닦다가 한숨 쉬고 2CV를 닦으며 한숨 쉬고 피칸토에 시동 걸며 한숨쉬고 하면서 비가 다 그친 남동쪽에서 유턴, 다시 돌아오는 길에 연료가 떨어져서 한숨 쉬고 CNG 가격이 조금 올라서 한숨 쉬고 휘발유 가격은 하유에서는 블루크루드로 자급하니 세계 어느나라의 평균보다 비싸다며 4개 소통어로 빼곡히 적힌 표지판을 보고 한숨을 쉬고 어쨌든 CNG를 가득 충전하고 공영주차장에 세워놓고 또 한숨을 쉬고 지나가는 버스를 타고 남서와 중앙을 가르는 다리 위에서 내리니 교통카드 요금이 너무 적어서 한숨을 쉬고 그렇게 걸어가야 하나 한숨을 쉬다가 어느 사거리에서 하얀 피아트 친퀘첸토 한 대가 경적과 하이빔 한 번으로 나를 가리키길래 누군지 봤는데 앨리라서 한숨.
뭔 한숨이 잦냐고 인형 마녀는 운전하면서 나를 놀리는데 내 집을 아느냐고 내가 묻는 말에는 자기가 내 집을 몰라서 해메던 중이었다고 농담하는데 그렇게 얻어걸린 지인 찬스와 집에 도착하면 인형마녀를 만난 냄새가 난다고 싫은 표정을 짓는 루미. 됐어, 방황 중에 차 얻어탄거야. 안 탔으면 됐다고? 야, 경적과 하이빔까지 했으면 나를 알아봤다는 소리 아니겠니? 삐치면서 저녁 먹으라고 하는 루미. 그렇게 하루가 가고 자동차로 출근. 구태여 자동차로 출근한 이유가 어차피 손님이 없을 바에는 여울오름에 들렀다 오려는 이유에서였지만 어찌 그렇게 하려면 아예 일을 쉬라는 권유를 받아서 포기하고 말았다. 아예 일을 하려고 카페 앞에 차를 세우니까 어차피 오늘 닫을거라고 천연덕스럽게 가게문을 잠그는 나리와 뻘줌하게 그 앞에서 서있을 뿐인 내가 있는 조금 웃긴 장면이 담겼다. 그렇게 나리는 가게 문을 잠그고 자기 차에 시동을 걸고는 바로 그 길로 떠나버렸다. 나랑 반대방향이네. 그렇게 숲 속을 달리는 기분은 일이 없다는 사실보다 나리가 오늘 영업을 접은게 내 탓인가가 더 커서 약간씩 줄어든 모양새로 나에게 다가왔다. 잠시 차를 세우고 캔커피를 마시는 지금은 여유롭다 못해서 게으를 지경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왜 오늘 나리가 장사를 접었나 하는 찝찝함으로 조금 베어물려 있어서 솔직히 빨리 일을 하러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외에 들지를 않았다.
이내 그런 생각이걸랑 벗어던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여울오름으로 올라갔다. 산길이 험해서 2단을 넣고 들어가야 하는 가파른 나선 모양의 길. 그리고 그 위에서는 미여울이라는 하유섬의 동서를 가르는 강이 시작하는 지점이다. 만약 하유섬이 계속 무주지였다면 여울오름 위에 계속 낙엽이 쌓여서 섬이 죽었을거라고 하는 것도 들어본 것이 있고 하유국 역사상 제일 먼저 이루어진 행정조치가 여울오름을 막고 있는 나무와 낙엽을 치우는 것이었다니 그냥 용천이 아니라고. 그렇게 용천을 막은 나무와 낙엽을 치우니 건천인 줄로 알았던 땅의 틈새가 원래는 좁아터진 강이라는 것이 알려져서 좁아서 미어터졌다고 미여울이라 하던가 세마가와라고 하던가. 앨리스블루색 피칸토를 중턱 주차라인에 세우고 막 도착한 등산철도가 나를 저 정상으로 데려다 준다. 홍수가 났었는데 등산철도가 멀쩡하네. 사실은 자동차로 정상까지 올라갈 수는 있지만 오늘은 좀 피곤함이 줄었으면 좋겠기에. 해가 지고 뜨는 별과 여울오름이 괜찮다고들 하고 위에서 바라보는 전망도 좋다고 하고 하니까 많이들 찾아오는 모양인데 그냥 용천을 품은 산일 뿐이니까 묘하다 이거지.
넘치지 않는 여울오름의 물은 마셔도 되긴 한데 목이 어지간히 마르지 않는 이상에야 아무도 마시지를 않는 것도 의아하고 용천 안에 동전을 던지면 안 된다고 해놨는데도 동전을 던지고 빠뜨려졌다며 좋아하는 몰상식한 놈들이 있는데 여기에 동전 던지면 관광객의 경우에는 재입국 불가처분에 추방이다. 하유국 유일의 수원에다 상록구가 통째로 숲으로 남은 이유가 그저 요정이 사는 숲이라 그런 것도 아니니까 이해해주기를 바라야 하는데 동전 던지고 추방당하는 관광객들은 항상 있고 그 때문에 등산철도가 생겼으니 미칠 노릇이지. 아무도 여울오름이 하유국에서 유일한 민물의 발원지라는 것도 모를 것이고 동전 때문에 여기가 마르면 하유국이 끝장이라는 것도 모를 것이고. 지금 동전 던진 한 명이 수갑 채워져서 끌려나가는데 관광 온 외국 사람들은 경찰을 욕하고 잡쉈고 그 장면에 환멸나서 하산한다. 등산철도로 내려가 2단 넣고 산을 내려오는 지금은 울어야 할까 화내야 할까 힘이 든다. 여전히 지나오는 대사관로에는 하유국 비자를 연장하지 않겠으며 본국의 의사를 불러달라고 아우성일 것이고 그 안에서 애매하고 우울한 사람들은 섬에 눌러붙겠다고 하겠지만 영주권 취득 요건을 보고는 얼굴을 찌푸리는 그런 풍경이 펼쳐질 것이고 나는 또 기름 게이지가 E에 가까워진 것을 보고 짜증이 날 뿐.
충전소에 가서 차에 CNG를 넣는다. 하유에서 휘발유나 경유를 주유하는 것은 환경에 관심없고 돈 많은 호구거나 외국에서 차를 들여온 여행자라는 인식이 박혀서 별로 안 좋아하는 성 싶다. 여행자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대부분 도로 표지판에 에스페란토가 적혀 있고 현대의 도시와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뽐내는 동화적인 정원도시라고 칭찬하기는 하는데 주재원이나 일하러 온 사람들은 비자 좀 취소해주거나 본국에서 의사를 불러달라고 하는 이상한 나라인게 문제려나. 그 중에서도 하유섬에 적응해서 하유국 여권과 영주자격을 신청하면 영주권이 국적인데다가 하유섬에 눌러살려는데 네놈은 부자라 재산이 너무 많으니 나라에 헌납하셔야 여권 줄거라고 하니까 미쳤습니까, 하유국 정부를 외치고 포기하는 그런 식이다. 그리고 블루크루드 도입 이전에는 주유소가 없고 자동차는 전부 가스로 굴린다고 이상해하는 부류도 있긴 했었고 백옥같은 살갗의 미인이라고 생각했더니 사실 자동인형이라 관광객 한 명은 기절하고 나머지는 히스테리를 일으키기도 하고 상록숲에서는 돌을 던졌을 뿐인데 요정한테 링 반데룽을 당해서 겨우 구출되는 사고도 있으니 이거 원.
기어는 1단에 넣고 브레이크에서 발 떼면서 액셀을 밟으며 클러치를 떼면 자동차는 슬슬 나간다. 힘이 없다 싶으면 액셀에서 발을 떼고 클러치를 밟고서 기어를 올려주고 클러치를 놓는 동시에 액셀을 밟아주고 정지할 때는 A에서 발을 떼고 B를 밟으며 C를 지그시 밟아주면 그만. 여기에서 조금만 부주의해도 시동이 꺼져버린다. 마치 인간관계와 너무 비슷해서 소름까지 돋을 정도지만 이런 말을 이해하는 누군가가 드물다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다. 정신을 놓고 액셀만 밟으면 스톨나는 수동변속기를 요즘 누가 타냐 하겠지만 마이너리티의 나라인 하유답게 여기는 수동변속기 비율이 높아서 자동변속기 밖에는 못 몬다 그러면 밤하늘에 별이 사라져도 눈 깜짝 안 할 녀석이라고 별나게 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도 출근하면 문을 닫고 있는 나리와 반대쪽으로 향하는 주황색 토요타 아쿠아를 바라볼 뿐이다. 그럴만도 한게 나리는 최근 가게를 정리하는 중이다. 나도 다른 일을 찾아야 하는데 힘들다고.
어느 중간에는 공영주차장 자리 요금으로 얼마간 나가고 루미가 울상을 지으면 근처 마트에 들러야 하고 그런 용도로 쓰는 자동차에 가장 저렴한 CNG를 채워도 역시 돈은 나가서 오늘은 루미에게 집에 있어라, 나는 늦는다 하고 통사무소 한 구석에서 일자리 알선을 기다린다. 역시 허탕이다. 그러다가 신문사 건물을 올려다본다. 사진이라면 하면서 여러가지 생각에 빠지다가 집으로 가자마자 이력서를 적어내려간다. 나리가 카페를 정리한다면 어쩔 수 없이 무엇이라도 해야한다. 생애를 적는 것에서 트라우마가 뻗었지만 여긴 하유다. 다들 애매하고 우울한 곳이니 진실을 적는다. 저의 학창시절은 원만하지 못한 교우관계 때문에 불행했고 그 때문에 단체로 행동하거나 혹은 제가 무언가를 주도하는 것에서 죄책감을 느낍니다.
다음 날에 이력서를 보내고 우선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직접 찍은 사진을 보여달라는 말에 폰에 저장된 내가 찍은 사진을 보여줬는데 면접관 얼굴이 굳는다. 또한 학창시절을 비롯해 일생이 불우한데 그 때문에 하유에 사는 것이냐고 영어로 물어보고 에스페란토 할 줄 아느냐고 에스페란토로 묻고 좋다고, 일상적인 사진을 찍는 놈이 필요했고 제보현장이나 순간포착 혹은 정말 일상의 한 장면을 열 장 이상 찍어서 보내주면 최저임금 쳐주겠고 일단 한 달 계약하자네. 그래, 하유국 노동법에 의하면 한 달 이하 고용이 불법이니 그렇게 하자고. 이메일 주소를 줄테니까 일단은 폰으로 찍고 카메라가 없다면 사내에서 빌려줄 수 없으니까 과감히 구입하길 추천한다고 하는데 쓴 웃음과 긴장한 얼굴을 보일 뿐이야. 나는 요새 돈을 녹이고 있어. 그래서 엄청나게 돈을 쓰기 싫은데 돈을 쓰게 되더라고 그래서 카메라는 자급하기 힘들겠는데요 말하고 나왔다. 폰 사진이라도 좋으니 좋은 사진 기다리겠다는 면접관의 말과 함께. 그렇게 버스를 타고 공영주차장에 도착하니 은빛 소년이 머리를 바람에 사각거리며 나를 유순한 눈빛으로 보고 있어. 자동차를 몰거야. 또 조수석에 다소곳이 앉아있기만 한다면 괴롭힐거야.
싫은 표정으로 조수석에 앉아 차창을 열고 바람을 쬐는 봄이와 오늘도 연료가 다 닳아서 그냥 휘발유 넣고 돈 날리자고 생각하는 나는 지금 충전소에서 서로 곤란해하고 있다. 직원이 나와서 도와드리냐는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주유 끝내고는 출발. 봄이는 아무래도 내가 비싸다고 하는 모양을 다 듣고는 그럼 차를 놓고 가자며 얘기하지만 차를 놓고 가면 오래걸려 한 마디에 조용해진다. 왠지 봄이의 그런 점이 귀엽다는 말이지. 여튼 간에 북서쪽의 설탕공장으로 차를 몰아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조그만 철길 위를 달리는 동차에 올라 너른 사탕무밭을 바라보며 시큰둥한 봄이 표정도 살피고 그저 쓰다듬어주는 그런 소중하고도 무료한 시간이 흘러갔다. 쉬고 싶을 때는 너른 들판 만한 곳이 따로 없어. 공장 안으로 누구나 들어올 수 있고 사탕무 농장 저 끄트머리는 북동쪽에 닿으니까 누구나 여기로 별을 세러 오거나 피크닉을 하러 오지. 공장 특유의 악취도 나지 않아. 그래도 봄이는 시큰둥하다. 시큰둥한 이유가 여기에 자기가 따라와서는 괜히 일을 망치는 것은 아닌가 싶다고 하는데 그런 봄이를 달래주러 흑사탕을 사주고 블루크루드와 바이오메탄 생산구역도 둘러보며 설명해줬지만 시큰둥해. 그리고 여름의 사탕무 수확을 사진에 담을 때도 시큰둥해서 그저 지나가는 레일버스를 세워 공장 한 바퀴를 돌고서 다시 주차장으로 왔다. 봄이는 돌아오는 길 내내 따분해 했다.
집으로 돌아오며 사진 스무 장을 신문 이메일로 보내주었다. 그리고 읽음 완료라고 뜨는 상태의 느낌. 루미는 새로운 일을 시작했냐고 하면서 행복해지자며 내 입꼬리를 위로 치켜올리는 장난을 했고 루미 손은 차갑고 촉촉하고 보드라워서 깜짝 놀라는 나를 보고는 싫은 표정을 지어보인다. 그렇게 루미는 내 머리 위에 탑 쌓고 뭐하는지 보다가 지르해졌는지 하품을 하고 소파에 누워 잠든다. 나도 사진 송부를 끝내고 내 방에 들어가서 잠들지. 좋은 꿈을 꾸라는 루미의 가호와 함께. 그렇게 새 아침이 밝아오고 집 앞 정류장에서 남서중앙으로 향하는 트램을 타고 신문사에 도착한다. 우물쭈물하다가 겨우 도착한 첫 자리에 앉아 기다리다가 처음으로 처음 뵙겠다며, 보나마나 경차를 몰고 다닐 상인데 조금 큰 차로 바꾸는 것이 나을 거라며 농담 같잖은 농담을 던지며 계약직이냐고 묻는다. 자기도 계약직이고 우리는 사무실에 앉아있을 이유가 거의 없다며 출근카드 찍고 공영주차장에 가자고 한다. 당최 뭔 이유로? 그리고 무슨 차를 타나로 트램 안에서 시작된 대화는 공영주차장에 들어오자마자 차게 식어서는 중고차 매장으로 가게 만드냐. 주차장에 나란히 세워진 피칸토와 미니, 2CV를 보더니 이걸로는 너무 작아서 안 된다고 차를 전부 팔라는 권유에서였다. 그래서 어쨌냐고? 애써 도로 가져가라는 얘기만 하던 딜러가 그 놈을 보더니 싫은 눈빛으로 비싸게 차를 사줬다. 그리고 내 차는 이제 에스테이트나 왜건이라 부르는 그것이 되었고. 어찌되었건 경차는 그만 타야 할거라고 하는데 그저 그 놈을 흘겨볼 뿐.
그 자식 때문에 선물 받았고 운 좋게 얻었고 한 번 갈아치운 차는 또 갈아치워졌다. 게다가 세 자동차를 갈아버리고 지금 내게 남은 것은 쓸데없이 뒷방망이 큰 차와 차는 큰 게 장땡이라는 멍청한 내 전임놈과 기껏 차를 돌려주면서까지 나에게 생각을 하게 해준 녀석과 금전으로 절교하게 된 것 뿐이다. 클러치가 가벼워서 좋고 짐칸이 커서 좋은 것은 그렇다 치고 이 자식은 하는 일이 익숙해질거라고 내 차를 강제로 바꾸게 한 뒤에 싱글싱글 웃었다. 씨발아, 내가 일부러 작은 차를 타는게 아니었단다. 그렇게 없는 놈으로 쳤으면 좋겠다는 놈은 계약직이라면서 내가 그 새끼 때문에 바꿔버린 차에 시동을 걸면 스톱하라면서 뒷문을 열어재끼고 5인승 웨건에 올라탄다고. 그리고 그 이후로 나는 자동차 운전을 거의 그만 두었다. 경비에게 자동차 열쇠를 맡기면서 에스테이트다, 쓰려면 쓰라고 열쇠를 맡기는데 자기 차는 르노 캉구다 하면서 열쇠는 맡아두겠다며 번호판 번호를 적은 스티커를 붙여 열쇠걸이에 걸어놓을 뿐이었다. 아니, 왜 남의 일에 신경까지 써서 의미를 없애버리는 하유섬에 안 어울리는 인간을 만났다 싶어서 주먹이 쥐어진다. 이런 분노는 처음인데.
그 자식은 트램으로 출근하냐면서 그거 막히면 곤란하다고, 좀 안 뜯어버리나 하면서 나를 짜증나게 하더니 자동차 얻어타는 것은 자신의 권리라고 말했다. 그 자식을 주먹으로 치는 대신에 계약직인데 잘도 출근했다고 비아냥. 그 말에 그 자식은 자기는 정직원으로 승진한 몸이라고 말하면서 나를 본격적으로 가축 취급하려고 해서 자리를 떴다. 정식 사원이 아니어도 이건 못 참아. 그 새끼 이름을 고발하고 윗선에 말해버리려고 한다. 당한 지 일주일이라 씨알이 먹힐 것이다. 순진하기도 하지. 다음 날에 그 놈 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보자. 그리고 자리가 비어지고 내가 그 자리에… 어라?
출근은 자동차가 없던 때부터 구태여 복잡해져서 타지 않는 지금까지 전철로 하고 퇴근도 역시 그렇다. 철도선을 달리다가 궤도선으로 들어가 노면전차로 움직이면 그 때로부터 두 정류장 뒤에 즐거운 나의 집이 있다. 피곤하면 쉬는거고 벌이가 안 좋으면 없는대로 사는게 낫다. 하지만 그 이외의 것들이 문제라면 모르겠어. 그렇게 마을 한바퀴를 산책한다. 결국에는 지쳐서 버스를 타고 돌아올 뿐인 그으런 나날들이야. 북서쪽의 블루크루드 공장과 설탕공장은 정상 가동 중이라는 보도와 함께 결국에는 공장이 하나 더 생긴 셈이라고 시위하는 부류가 있는 평화로운 보도가 흘러나오는 텔레비전을 끄고 가만히 포옥 나를 안아주는 루미와 그게 귀찮아서 싫은 소리를 내는 나. 오늘은 반대의 상황이구나 하면서도 이게 뭐냐 싶은 삶이다. 폰은 갑자기 벽돌이 되어서 겨우 복구했더니 파일을 반쯤 날려버렸고 그 때문에 언짢아지는 하루라니. 그리고 천천히 차를 몰아볼까 했는데 앞 범퍼가 살짝 긁힌 꼴이라니. 천천히 북서쪽으로 차를 몰아 하유제당의 공장지대로 들어가면 널리 뻗어있는 밭이 나오고 나는 내 피칸토로 런치 스타트를 연습한다. 액셀을 밟아 3700RPM 즈음에 회전수를 맞추고 클러치를 떼어 튀어나간다. 그리고 급감속할 뿐. 블루크루드와 바이오메탄 생산구역까지 도착하고는 기름 게이지를 잠시 확인한다. 여기서 충전이 된다면 좋겠어.
멍하게 있다가 커피 머신에 손을 델 뻔한 나날만 이어지며 그저 그런 하루들이 지나간다. 인형 마녀 앨리는 이제 나리랑 오해 풀고 친한 친구가 되었지만 아직도 북동쪽 괴담을 믿는 부류는 많아서 글쎄지만. 어쨌든지 일을 하는 것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일하지 않으면 돈을 못 벌고 돈을 못 벌면 또 주택공사에서 나를 집에 가둬서 죽일 수도 있으니 그걸 위해서라도 열심히 일해야 한다. 굶어죽지 않을 정도만 벌어서 겨우겨우 살아가는 일생이고 아무하고도 친하게 지내지 못하는 아름다운 섬에서의 일상이라니, 몇몇 사람들은 나에게 돈 줄테니 하유국 영주권을 팔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는 안 팔아. 적어도 여기니까 내가 이렇게 살 수 있는거야.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살려고 하면 게으름뱅이라 그러거나 일자리 주는 사람들에게 멱살 잡히고 따귀나 맞으며 일이라는 일은 전부 내 몫이 아니라고 가르쳐 준다고. 적어도 하유섬이라 가능한 일들이고. 일을 한 건지 만 건지 하면서 퇴근 후, 남북간선도로를 달려 남서쪽 해안가의 공영주차장에 도착하기 까지 앞으로 15분. 그리고 탈세 때문에 징역을 받고 교도소가 없는 이 나라에서 여권 정지먹은 뒤에 다른 나라 교도소에 갇혀있는 주인장의 카페가 나오면 우회전, 그리고 남서중앙에서 잠시 차를 세우자. 전화가 와서 말이야. 여보세요 다음에 히익하고 전화를 끊는 것을 보아 다음 정황상 문자가 올 것이다. 봄이가 '남서중앙에 있는데, 거기 있어요?'라고 보낸 문자에 긍정의 답변을 보낸다. 그런데 봄이가 내 차를 알까.
봄이는 앨리스 블루색 경차인 내 차를 잘 찾아왔다.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메고 가만히 무릎에 손을 다소곳이 올리고 눈을 감는다. 차에 타면 항상 자더라고. 볼을 쿡 찔러서 안 자도 좋다고 눈을 뜨고 있어달라고 하자 얼굴을 붉히는 봄이. 아 미안해. 그냥 눈만 뜨고 있어 줘. 그리고 남서중앙을 한바퀴 돌고 온통 초록빛이 가득한 여름의 들판으로 차를 몰았다. 시내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이렇게 푸릇한 하유가 마음에 들었더랬지. 봄이는 마치 자기가 인형이라는 사실을 부정당한 듯이 인형처럼 다소곳하게 앉아있기만 했고 그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져서 잠시 차를 세우고 봄이의 은빛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궁금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봄이와 매우 보드랍고 폭신한 봄이 머리카락이 마음을 녹게 만들어서 잠시 이 풀밭에 내려서 간식 먹을까 하고 물어보니 봄이는 고개를 저어. 가벼운 침묵과 한숨 끝에 남서 해안가로 돌아와 오늘은 즐거웠다고 말하는 심약한 소년인형과 헤어지고 그저 뭐냐, 자동차 연료 게이지가 0에 가깝게 변해가고 있어서 충전소에 들렀다. 충전소에 들러서 셀프 충전을 준비하던 중에 쓸 데없이 귀여운 하얀 피아트에 휘발유를 넣고 있는 앨리를 보았다. 안녕, 앨리. 너도 차를 몰긴 하는구나. 그랬더니 살짝 얼굴을 찡그리고 어제 산 차라고, 휘발유 넣는 것을 보면 감이 안 오냐고 하네. 그렇긴 하지. 하유는 블루 크루드 도입하고서야 블루 크루드인가 뭔가로 만든 것만 쓰는 조건으로 휘발유랑 디젤 풀었잖아. 앨리는 용건 없으면 서로 각자 할 일을 하자고 하는데 뭐야, 그냥 신기해. 그런 대화 와중에 나는 CNG인 내 차에 LPG를 넣을 뻔했지만 코크가 잘 안 들어간다는 것으로 알아차려서 너무 다행이었다.
그렇게 빠져나와서는 다시 공영주차장에 차 세우고 집으로 들어간다. 피곤해서 바로 소파에 누워 곯아떨어지는 나를 걱정하는 푸른 요정 메이드와 아무 일 없이 자고 싶은 내가 집 안에 있었다. 트램이 집 앞을 지나가고 나는 멀뚱히 그 광경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도 그저 피식 웃다가도 울어버렸다. 그냥 하루하루가 찝찝해서 다시 출근하고 손님이 없는 카페를 지키고 자동차로 막히는 도로를 참아내거나 만차 수준의 전철과 버스를 참아내야만 하는 그런 일상은 짜증나고 한스러울 뿐이다. 전철이 보여주는 사랑스러운 하유의 정원같은 풍경이 뭔가 싶을 정도로 모두가 싫어지고 하는 기분은 역시 살의려나 하면서 철도선이 끝나는 남서중앙역의 전 역에서 내려 기분을 떨쳐버리려 노력했다. 그리고 기분은 역시 떨쳐지지 못했고 나는 나를 실컷 싫어하면서까지 집으로 걸어와 루미가 걱정할 정도의 이상행동을 보인 모양이다. 일을 좀 쉬고 싶다고 나리에게 연락하니 쉬고 싶을 때 쉬라고 해주었네. 고마워라. 마음껏 쉬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나는 무작정 정류장에서 관문섬 방향으로 가는 전철에 올라 점심은 그곳에서 먹을 생각을 하고만 있었다.
근사한 디저트와 노면전차, 정원과 우울함. 그것을 안고서 마주친 자동인형 친구. 하지만 서로가 달콤한 것을 먹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아. 그런 가운데에서도 근사함은 피어나지만 금세 그 기운을 잃어버리는 성 싶었다. 봄이는 관문섬에는 이따금씩 오고 있으니까 길 잃을 걱정은 말라고 말하지만 역시 걱정된다. 외국에서 오는 인간들 중에는 하유국 국민성을 전혀 이해 못하는 녀석들 많거든. 그러자 끄덕이며 창 밖을 가리킨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구나. 비를 맞고 역으로 뛰어가는 대로변의 궤도공사와 이내 역에 도착하는 시험정원행 전철이 오늘은 빗속을 뚫고 달린다. 해저터널을 벗어나와 바닷가와 도로를 끼고 달리다가 바로 남서해안주택단지에 도착한다. 카드를 찍고 내리면 오늘의 방황은 끝. 마당에는 오랜만에 보는 하얀 고양이와 대문을 열면 상냥하게 어서오세요 주인님이라 메이드 놀이를 멈추지 않는 푸른 요정 루미가 있다. 길 건너 시험정원의 라벤더와 해안가 모래사장의 해당화 향기가 섞여서 향기로운 가운데, 루미의 가호로 좋은 꿈을 꾸었다. 마치 모두가 나에게 도움을 받아서 고맙다고 박수쳐주는 꿈이었는데 그 이후에 나는 눈을 살짝 감고 관짝에 누워 잠든 내 모습을 보았지. 하지만 오히려 그걸 보고 마음은 편해지고 말았지.
전철 자리에 앉아 자동차들과 같이 달리는 구간을 벗어나 전용구간으로 들어간 열차가 보여주는 분주하고도 정원같은 이 나라의 풍경을 땅 위와 고가, 지하로 바라보면서 숲 속을 달려나오면 바로 두세 정류장 다음이 내 일터가 있는 곳. 그곳에서 어서오라고, 일할 준비는 다 해놓으라며 요즘은 자동차로 출근하지 않는 모양이라고 하는데 글쎄, 그건 내 마음에 달려있는 문제이고. 역시 오늘도 사람들은 잘 오지 않지만 그것 나름대로의 즐거움이 있어서 돈 벌며 하루를 허비하는 것이지. 집에 도착하면 공영주차장에 들러 친애하는 피칸토와 2CV와 미니의 먼지를 떨고 집에 돌아와 루미가 어쩌면 좋을까요 하는 소리를 듣는다. 먹을 것이 떨어졌구나 하는 말에 끄덕이는 루미를 공영주차장까지 데리고 가서 2CV에 태우고 시장을 보러 가는데 시큰둥한 루미와 순간 일어나는 스톨. 그리고 시장이 아니라 마트로 가서 고기보다는 야채를 사고 돌아오는 길에 얼마나 썼냐고 묻는 루미는 계속 시옷 자 입을 하고 잘 됐어요, 그 정도 쓸 줄 알면 하면서 시큰둥해 했다. 일단은 집 앞까지 가서 루미와 장 본 물건을 내려놓고 나는 남동구 초입을 찍고 자동차를 돌려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지. 그리고 야채를 손질하는 루미한테 그냥 내가 하겠다고 했다가 싫은 소리를 오랫만에 듣고 그저 기다리는 저녁시간이었다. 맛이 좋은 야채스튜 정도라고 할 수 없는 맛있는 음식과 항상 시무룩해서 내일 자살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본질은 메이드 놀이를 하며 나를 도우려드는 우울 요정일 뿐이다.
오늘은 자동차로 출근. 피칸토가 블루 크루드에 약간 부조를 일으키는 느낌만 아니라면 도로도 막히지 않고 상록숲을 가로지르는 길은 쾌적했다. 엔진 부조 문제도 약간 덜덜거린다 싶은 느낌이라 CNG로 바꾸면 해결되는 문제. 그렇게 네스토 데 피고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리에게 인사한다. 머신을 점검하고 스팀을 뽑아보고 처음 나오는 커피는 주인장과 함께 나눠마시며 서늘한 여름이 특징인 하유섬의 북동쪽 끝자락, 아무도 잘 찾지는 않지만 단골이 없지는 않는 숲 바로 옆의 카페거리는 깨어나며 서서히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한다. 네스토 데 피고는 그 중에서 일직 여는 편이기도 하고 나는 남서쪽에서 북동쪽까지 알바하러 와야 하기 때문에 꽤 일찍 열기도 일찍 여는 편. 이런 얘기로 시작하는 매일이 평범하다 하면 평범한 매일이지만 그게 나리와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등공신이라면 어찌해야 할까 하다가 나리가 화난 얼굴로 째려보는 것을 보았다. 커피 내리자. 그리고 오지도 않는 손님을 기다리면 북서쪽에서 넘어오는 공장 쪽의 사람이거나 숲을 벗어나서 길을 물어보는 사람들 뿐이다. 길을 물어보면 버스나 트램을 타라고 가르쳐 주고 커피를 사주면 고마워하는 그런 형편인데 그렇게 일을 해봤자 나리는 나를 안쓰럽게만 보는 형편이다. 그리고 오늘은 나리가 나를 불러 조금은 사적인 긴 대화를 하자고 하는데 너무 긴 대화가 아니기를 빌며.
나리는 그렇게 아무도 오지 않는 카페에서 덧없는 표정으로 내 손을 꼭 쥐며 마치 일상이 없는 사람 같다는 이야기로 시작해 도대체 왜 그렇게 외롭게 살고 싶어하는 것인지 물었다. 나는 지금 하유섬에 있다. 모두들 서로를 잘 헤아려주지. 다른 나라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상냥함, 그것에 둘러싸여 혼자 살 수 있는 장소라서 여기에 온거야. 그 밖에 이유는 없다.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니 나리는 갑자기 나를 걱정하는 표정으로 변하며 제발 집에만 처박히면 아무 것도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라면서 제발 평범함을 연기하지 말라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나는 그냥 네 카페의 알바생이고 일용직보다 나은 일을 하고 있지만 역시 모르겠어. 삶이 어려워. 나는 겨우 여기에서 삶을 찾았어. 지리멸렬해도 들어 줘. 하유는 근사해. 그래서 나는 여기로 왔지. 하지만 섞으면 흐려지는 물감같은 일상이 너무 싫어. 뭔가를 하면 자꾸만 이야기가 이어지지를 않아. 나리는 금방 표정이 우울해지면서 하유에서도 사람들을 경계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고 하면서 이제 하려던 이야기를 하겠다고 하며 점차 카페를 정리하려고 한다면서, 일자리는 더 이상 찾아줄 수 없으니 내가 어떻게 해야 하겠다고 하네. 그리고 점차 다가오는 퇴근시간. 피칸토에 시동을 걸며 맑고 투명한 겨울 밤에 별을 바라보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라디오와 소통원활한 고속도로, 앞질러가는 오토바이와 함께 고민이 더욱 쌓여가는 여름날 저녁을 보내고 있었다.
하유에 오기 전에도 경계심이 심하고 사람들의 평범한 대화주제를 잘 몰랐던 나는 그냥 마구 말해버리거나 혹은 중얼거리거나 하는 그런 버릇이 있었고 하유 사람들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기에 금방 고쳤다. 상처받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하유의 국민성 때문인지 서로에게 상냥하고 조심스러운 우울한 사람들이 모여 사니까 여기, 남동의 허브농장에도 세인트존스워트만 많이 팔리는 실정이라며 꽤 괜찮은 것으로 드리겠다며 진심으로 웃는 상인의 말을 무시하면서도 계속 그 주변을 맴돌았다. 자동차로 언덕을 올라가기 전, 근처에 있는 충전소에서 CNG를 채우고 그렇게 맑고 깨끗하게 타오르는 것에 대한 환상을 가져보았다. 맑고 깨끗한 마음씨의 내 친구 소년인형이 떠올라. 그 아이는 참 얌전하고 부끄럼쟁이라 다른 나라에서는 살지 못할 것 같기도 하지. 그렇게 언덕 정상에 차를 세우고 봄이에게 문자를 보내보자. 봄이는 자동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자고 제안한 나의 문자에 아무런 답장을 주지 않았다. 나나 봄이나 너무 공통점이 많지만 순진한 인형소년과 결함이 많은 주제에 오만한 나 따위는 개 발의 편자라고 할 수 있지만. 마치 눈을 마주치면 상대를 돌로 만들어 버리는 소심한 소녀가 방랑벽이 있는 대범한 소년의 설득으로 세상으로 나와 항상 실수하는 자신을 싫어하며 계속해서 세상을 되돌리는 그런 느낌은 아니고 예전부터 괴롭힘을 받아왔기에 자신을 스스로 한심하게 여기고 세상을 저주하는 사근사근한 독설가 느낌이기 때문에 그 아이도 사실은 나를 너무 싫어할지도 몰라.
그렇게 공영주차장 도착. 차를 더 몰고서 어디론가 가고자 했지만 글쎄. 그리고 팔아도 되돌아오는 낡은 두 대와 주로 사용하는 한 대는 경비가 신경을 써줘서 항상 나란히 세울 수 있다는 데에 감사하고 집에 돌아오면 메이드 놀이를 하는 푸른 요정이 어서오라고 인사로 맞아주고 그걸 무시하면 볼을 부풀리며 싫은 소리를 내는 그게 행복이지 하면서 비일상을 일상으로 여기며 살고 있는 듯한 느낌에 헛웃음이 좀 나온다. 인터넷으로 어딘가가 좋을지 검색을 해보기는 하는데 그냥 졸음이 쏟아질 뿐. 그렇게 몽롱한 상태에서 뭔가를 하려고 보면 그냥 곯아떨어져 버린 경우가 너무 많다. 루미가 후에엥거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망친 요리와 난감해하는 루미가 있어서 뭔 일이지 물어보고 요리를 망쳐서 오늘 굶어야 한다고 하는 루미하고 검댕이 어지간히 묻은 주방을 닦고 가만히 있다 과자로 저녁을 때우고 하루가 끝났다. 오늘은 일찍 남서쪽을 떠나 간선도로를 따라 상록숲 근처에서 나와 천천히 차를 몰고 상록숲 속을 달리면 이정표가 가르쳐주는대로 따라가 여울오름을 올랐다. 상록숲 가운데에 강이 솟아오르는 곳으로 천천히 간다. 비가 좀 굳게 내리고 있는 중이지만 그래도 천천히 전조등 켜고 올라가면 될거야. 그리고 증턱쯤 왔을까,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비를 맞고있는 소방사가 차를 돌려 북서쪽으로 가라고 하네.
정상에 뭔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지금 갔다가는 여울오름이 범람할거라 올라오지 않는 편이 좋을거래. 그래서 차를 돌려서 일단 세운 후에 나리에게 전화를 건다. 비가 쌔려붓는다, 어떡하냐. 나리는 말도 마라면서 상록숲에 있으면 나오는게 좋겠다고 왠지 네가 어디 갔는지 알고 있다는 투로 말했다. 천천히 상록숲을 빠져나와 비를 헤치고 북서쪽으로 오니까 비가 보닛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라디오에서는 저지대 침수피해를 막기 위한 수칙을 공용어 네 개로 방송 중이고 최악의 홍수라고 낄낄거리는데 이게 장난같은가. 와이퍼가 물을 밀어내고 하이드로플래닝이 와서 미끄러지는 차랑 이내 네스토 데 피고에 도착해 안으로 뛰어 들어가니 사람들이 조금 많은 것과 나리가 뉴스특보를 보면서 한숨 쉬는 광경을 보았을 뿐이다. 비 그치기 전까지는 여기 있는 수밖에. 축축하고 습하다. 푸른 요정은 이런 비오는 날을 맑고 투명하다고 좋아해서 막 죽기 직전까지 허옇게 질려서는 맑고 투명한 날이라며 오들오들 떨기도 하는데 루미가 걱정되는구나. 비는 여기서 일하다 보면 그치게 되겠지만 이미 비는 꽤 그쳐있고 우산 없이 나갈 수 있는 정도가 되자 따뜻한 커피와 타르트를 먹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가고 나리와 나도 퇴근할 수 있게 되었다. 거의 특근을 했구먼.
집에 돌아오자 루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메이드 놀이에 여념이 없다. 그렇게 돌봐주는 것도 괜찮지만 여튼 나는 귀찮아. 그러니까 그만 두었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좋아. 이제는 여름도 왔겠다 마당에 습기를 좋아하는 수국과 박하를 심어 가꾸려고 하기도 하고 강가를 따라서 걷기도 하고 공영주차장에 세워놓은 자동차를 닦고 바닷가를 산책하고 하는 일상이 계속되는 것인가 하면서 막상 하나도 안 하고 싶어하며 무료해 했다. 그냥 그렇게 멍하게 있다가 또 공영주차장으로 나가서 미니를 닦다가 한숨 쉬고 2CV를 닦으며 한숨 쉬고 피칸토에 시동 걸며 한숨쉬고 하면서 비가 다 그친 남동쪽에서 유턴, 다시 돌아오는 길에 연료가 떨어져서 한숨 쉬고 CNG 가격이 조금 올라서 한숨 쉬고 휘발유 가격은 하유에서는 블루크루드로 자급하니 세계 어느나라의 평균보다 비싸다며 4개 소통어로 빼곡히 적힌 표지판을 보고 한숨을 쉬고 어쨌든 CNG를 가득 충전하고 공영주차장에 세워놓고 또 한숨을 쉬고 지나가는 버스를 타고 남서와 중앙을 가르는 다리 위에서 내리니 교통카드 요금이 너무 적어서 한숨을 쉬고 그렇게 걸어가야 하나 한숨을 쉬다가 어느 사거리에서 하얀 피아트 친퀘첸토 한 대가 경적과 하이빔 한 번으로 나를 가리키길래 누군지 봤는데 앨리라서 한숨.
뭔 한숨이 잦냐고 인형 마녀는 운전하면서 나를 놀리는데 내 집을 아느냐고 내가 묻는 말에는 자기가 내 집을 몰라서 해메던 중이었다고 농담하는데 그렇게 얻어걸린 지인 찬스와 집에 도착하면 인형마녀를 만난 냄새가 난다고 싫은 표정을 짓는 루미. 됐어, 방황 중에 차 얻어탄거야. 안 탔으면 됐다고? 야, 경적과 하이빔까지 했으면 나를 알아봤다는 소리 아니겠니? 삐치면서 저녁 먹으라고 하는 루미. 그렇게 하루가 가고 자동차로 출근. 구태여 자동차로 출근한 이유가 어차피 손님이 없을 바에는 여울오름에 들렀다 오려는 이유에서였지만 어찌 그렇게 하려면 아예 일을 쉬라는 권유를 받아서 포기하고 말았다. 아예 일을 하려고 카페 앞에 차를 세우니까 어차피 오늘 닫을거라고 천연덕스럽게 가게문을 잠그는 나리와 뻘줌하게 그 앞에서 서있을 뿐인 내가 있는 조금 웃긴 장면이 담겼다. 그렇게 나리는 가게 문을 잠그고 자기 차에 시동을 걸고는 바로 그 길로 떠나버렸다. 나랑 반대방향이네. 그렇게 숲 속을 달리는 기분은 일이 없다는 사실보다 나리가 오늘 영업을 접은게 내 탓인가가 더 커서 약간씩 줄어든 모양새로 나에게 다가왔다. 잠시 차를 세우고 캔커피를 마시는 지금은 여유롭다 못해서 게으를 지경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왜 오늘 나리가 장사를 접었나 하는 찝찝함으로 조금 베어물려 있어서 솔직히 빨리 일을 하러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외에 들지를 않았다.
이내 그런 생각이걸랑 벗어던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여울오름으로 올라갔다. 산길이 험해서 2단을 넣고 들어가야 하는 가파른 나선 모양의 길. 그리고 그 위에서는 미여울이라는 하유섬의 동서를 가르는 강이 시작하는 지점이다. 만약 하유섬이 계속 무주지였다면 여울오름 위에 계속 낙엽이 쌓여서 섬이 죽었을거라고 하는 것도 들어본 것이 있고 하유국 역사상 제일 먼저 이루어진 행정조치가 여울오름을 막고 있는 나무와 낙엽을 치우는 것이었다니 그냥 용천이 아니라고. 그렇게 용천을 막은 나무와 낙엽을 치우니 건천인 줄로 알았던 땅의 틈새가 원래는 좁아터진 강이라는 것이 알려져서 좁아서 미어터졌다고 미여울이라 하던가 세마가와라고 하던가. 앨리스블루색 피칸토를 중턱 주차라인에 세우고 막 도착한 등산철도가 나를 저 정상으로 데려다 준다. 홍수가 났었는데 등산철도가 멀쩡하네. 사실은 자동차로 정상까지 올라갈 수는 있지만 오늘은 좀 피곤함이 줄었으면 좋겠기에. 해가 지고 뜨는 별과 여울오름이 괜찮다고들 하고 위에서 바라보는 전망도 좋다고 하고 하니까 많이들 찾아오는 모양인데 그냥 용천을 품은 산일 뿐이니까 묘하다 이거지.
넘치지 않는 여울오름의 물은 마셔도 되긴 한데 목이 어지간히 마르지 않는 이상에야 아무도 마시지를 않는 것도 의아하고 용천 안에 동전을 던지면 안 된다고 해놨는데도 동전을 던지고 빠뜨려졌다며 좋아하는 몰상식한 놈들이 있는데 여기에 동전 던지면 관광객의 경우에는 재입국 불가처분에 추방이다. 하유국 유일의 수원에다 상록구가 통째로 숲으로 남은 이유가 그저 요정이 사는 숲이라 그런 것도 아니니까 이해해주기를 바라야 하는데 동전 던지고 추방당하는 관광객들은 항상 있고 그 때문에 등산철도가 생겼으니 미칠 노릇이지. 아무도 여울오름이 하유국에서 유일한 민물의 발원지라는 것도 모를 것이고 동전 때문에 여기가 마르면 하유국이 끝장이라는 것도 모를 것이고. 지금 동전 던진 한 명이 수갑 채워져서 끌려나가는데 관광 온 외국 사람들은 경찰을 욕하고 잡쉈고 그 장면에 환멸나서 하산한다. 등산철도로 내려가 2단 넣고 산을 내려오는 지금은 울어야 할까 화내야 할까 힘이 든다. 여전히 지나오는 대사관로에는 하유국 비자를 연장하지 않겠으며 본국의 의사를 불러달라고 아우성일 것이고 그 안에서 애매하고 우울한 사람들은 섬에 눌러붙겠다고 하겠지만 영주권 취득 요건을 보고는 얼굴을 찌푸리는 그런 풍경이 펼쳐질 것이고 나는 또 기름 게이지가 E에 가까워진 것을 보고 짜증이 날 뿐.
충전소에 가서 차에 CNG를 넣는다. 하유에서 휘발유나 경유를 주유하는 것은 환경에 관심없고 돈 많은 호구거나 외국에서 차를 들여온 여행자라는 인식이 박혀서 별로 안 좋아하는 성 싶다. 여행자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대부분 도로 표지판에 에스페란토가 적혀 있고 현대의 도시와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뽐내는 동화적인 정원도시라고 칭찬하기는 하는데 주재원이나 일하러 온 사람들은 비자 좀 취소해주거나 본국에서 의사를 불러달라고 하는 이상한 나라인게 문제려나. 그 중에서도 하유섬에 적응해서 하유국 여권과 영주자격을 신청하면 영주권이 국적인데다가 하유섬에 눌러살려는데 네놈은 부자라 재산이 너무 많으니 나라에 헌납하셔야 여권 줄거라고 하니까 미쳤습니까, 하유국 정부를 외치고 포기하는 그런 식이다. 그리고 블루크루드 도입 이전에는 주유소가 없고 자동차는 전부 가스로 굴린다고 이상해하는 부류도 있긴 했었고 백옥같은 살갗의 미인이라고 생각했더니 사실 자동인형이라 관광객 한 명은 기절하고 나머지는 히스테리를 일으키기도 하고 상록숲에서는 돌을 던졌을 뿐인데 요정한테 링 반데룽을 당해서 겨우 구출되는 사고도 있으니 이거 원.
기어는 1단에 넣고 브레이크에서 발 떼면서 액셀을 밟으며 클러치를 떼면 자동차는 슬슬 나간다. 힘이 없다 싶으면 액셀에서 발을 떼고 클러치를 밟고서 기어를 올려주고 클러치를 놓는 동시에 액셀을 밟아주고 정지할 때는 A에서 발을 떼고 B를 밟으며 C를 지그시 밟아주면 그만. 여기에서 조금만 부주의해도 시동이 꺼져버린다. 마치 인간관계와 너무 비슷해서 소름까지 돋을 정도지만 이런 말을 이해하는 누군가가 드물다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다. 정신을 놓고 액셀만 밟으면 스톨나는 수동변속기를 요즘 누가 타냐 하겠지만 마이너리티의 나라인 하유답게 여기는 수동변속기 비율이 높아서 자동변속기 밖에는 못 몬다 그러면 밤하늘에 별이 사라져도 눈 깜짝 안 할 녀석이라고 별나게 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도 출근하면 문을 닫고 있는 나리와 반대쪽으로 향하는 주황색 토요타 아쿠아를 바라볼 뿐이다. 그럴만도 한게 나리는 최근 가게를 정리하는 중이다. 나도 다른 일을 찾아야 하는데 힘들다고.
어느 중간에는 공영주차장 자리 요금으로 얼마간 나가고 루미가 울상을 지으면 근처 마트에 들러야 하고 그런 용도로 쓰는 자동차에 가장 저렴한 CNG를 채워도 역시 돈은 나가서 오늘은 루미에게 집에 있어라, 나는 늦는다 하고 통사무소 한 구석에서 일자리 알선을 기다린다. 역시 허탕이다. 그러다가 신문사 건물을 올려다본다. 사진이라면 하면서 여러가지 생각에 빠지다가 집으로 가자마자 이력서를 적어내려간다. 나리가 카페를 정리한다면 어쩔 수 없이 무엇이라도 해야한다. 생애를 적는 것에서 트라우마가 뻗었지만 여긴 하유다. 다들 애매하고 우울한 곳이니 진실을 적는다. 저의 학창시절은 원만하지 못한 교우관계 때문에 불행했고 그 때문에 단체로 행동하거나 혹은 제가 무언가를 주도하는 것에서 죄책감을 느낍니다.
다음 날에 이력서를 보내고 우선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직접 찍은 사진을 보여달라는 말에 폰에 저장된 내가 찍은 사진을 보여줬는데 면접관 얼굴이 굳는다. 또한 학창시절을 비롯해 일생이 불우한데 그 때문에 하유에 사는 것이냐고 영어로 물어보고 에스페란토 할 줄 아느냐고 에스페란토로 묻고 좋다고, 일상적인 사진을 찍는 놈이 필요했고 제보현장이나 순간포착 혹은 정말 일상의 한 장면을 열 장 이상 찍어서 보내주면 최저임금 쳐주겠고 일단 한 달 계약하자네. 그래, 하유국 노동법에 의하면 한 달 이하 고용이 불법이니 그렇게 하자고. 이메일 주소를 줄테니까 일단은 폰으로 찍고 카메라가 없다면 사내에서 빌려줄 수 없으니까 과감히 구입하길 추천한다고 하는데 쓴 웃음과 긴장한 얼굴을 보일 뿐이야. 나는 요새 돈을 녹이고 있어. 그래서 엄청나게 돈을 쓰기 싫은데 돈을 쓰게 되더라고 그래서 카메라는 자급하기 힘들겠는데요 말하고 나왔다. 폰 사진이라도 좋으니 좋은 사진 기다리겠다는 면접관의 말과 함께. 그렇게 버스를 타고 공영주차장에 도착하니 은빛 소년이 머리를 바람에 사각거리며 나를 유순한 눈빛으로 보고 있어. 자동차를 몰거야. 또 조수석에 다소곳이 앉아있기만 한다면 괴롭힐거야.
싫은 표정으로 조수석에 앉아 차창을 열고 바람을 쬐는 봄이와 오늘도 연료가 다 닳아서 그냥 휘발유 넣고 돈 날리자고 생각하는 나는 지금 충전소에서 서로 곤란해하고 있다. 직원이 나와서 도와드리냐는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주유 끝내고는 출발. 봄이는 아무래도 내가 비싸다고 하는 모양을 다 듣고는 그럼 차를 놓고 가자며 얘기하지만 차를 놓고 가면 오래걸려 한 마디에 조용해진다. 왠지 봄이의 그런 점이 귀엽다는 말이지. 여튼 간에 북서쪽의 설탕공장으로 차를 몰아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조그만 철길 위를 달리는 동차에 올라 너른 사탕무밭을 바라보며 시큰둥한 봄이 표정도 살피고 그저 쓰다듬어주는 그런 소중하고도 무료한 시간이 흘러갔다. 쉬고 싶을 때는 너른 들판 만한 곳이 따로 없어. 공장 안으로 누구나 들어올 수 있고 사탕무 농장 저 끄트머리는 북동쪽에 닿으니까 누구나 여기로 별을 세러 오거나 피크닉을 하러 오지. 공장 특유의 악취도 나지 않아. 그래도 봄이는 시큰둥하다. 시큰둥한 이유가 여기에 자기가 따라와서는 괜히 일을 망치는 것은 아닌가 싶다고 하는데 그런 봄이를 달래주러 흑사탕을 사주고 블루크루드와 바이오메탄 생산구역도 둘러보며 설명해줬지만 시큰둥해. 그리고 여름의 사탕무 수확을 사진에 담을 때도 시큰둥해서 그저 지나가는 레일버스를 세워 공장 한 바퀴를 돌고서 다시 주차장으로 왔다. 봄이는 돌아오는 길 내내 따분해 했다.
집으로 돌아오며 사진 스무 장을 신문 이메일로 보내주었다. 그리고 읽음 완료라고 뜨는 상태의 느낌. 루미는 새로운 일을 시작했냐고 하면서 행복해지자며 내 입꼬리를 위로 치켜올리는 장난을 했고 루미 손은 차갑고 촉촉하고 보드라워서 깜짝 놀라는 나를 보고는 싫은 표정을 지어보인다. 그렇게 루미는 내 머리 위에 탑 쌓고 뭐하는지 보다가 지르해졌는지 하품을 하고 소파에 누워 잠든다. 나도 사진 송부를 끝내고 내 방에 들어가서 잠들지. 좋은 꿈을 꾸라는 루미의 가호와 함께. 그렇게 새 아침이 밝아오고 집 앞 정류장에서 남서중앙으로 향하는 트램을 타고 신문사에 도착한다. 우물쭈물하다가 겨우 도착한 첫 자리에 앉아 기다리다가 처음으로 처음 뵙겠다며, 보나마나 경차를 몰고 다닐 상인데 조금 큰 차로 바꾸는 것이 나을 거라며 농담 같잖은 농담을 던지며 계약직이냐고 묻는다. 자기도 계약직이고 우리는 사무실에 앉아있을 이유가 거의 없다며 출근카드 찍고 공영주차장에 가자고 한다. 당최 뭔 이유로? 그리고 무슨 차를 타나로 트램 안에서 시작된 대화는 공영주차장에 들어오자마자 차게 식어서는 중고차 매장으로 가게 만드냐. 주차장에 나란히 세워진 피칸토와 미니, 2CV를 보더니 이걸로는 너무 작아서 안 된다고 차를 전부 팔라는 권유에서였다. 그래서 어쨌냐고? 애써 도로 가져가라는 얘기만 하던 딜러가 그 놈을 보더니 싫은 눈빛으로 비싸게 차를 사줬다. 그리고 내 차는 이제 에스테이트나 왜건이라 부르는 그것이 되었고. 어찌되었건 경차는 그만 타야 할거라고 하는데 그저 그 놈을 흘겨볼 뿐.
그 자식 때문에 선물 받았고 운 좋게 얻었고 한 번 갈아치운 차는 또 갈아치워졌다. 게다가 세 자동차를 갈아버리고 지금 내게 남은 것은 쓸데없이 뒷방망이 큰 차와 차는 큰 게 장땡이라는 멍청한 내 전임놈과 기껏 차를 돌려주면서까지 나에게 생각을 하게 해준 녀석과 금전으로 절교하게 된 것 뿐이다. 클러치가 가벼워서 좋고 짐칸이 커서 좋은 것은 그렇다 치고 이 자식은 하는 일이 익숙해질거라고 내 차를 강제로 바꾸게 한 뒤에 싱글싱글 웃었다. 씨발아, 내가 일부러 작은 차를 타는게 아니었단다. 그렇게 없는 놈으로 쳤으면 좋겠다는 놈은 계약직이라면서 내가 그 새끼 때문에 바꿔버린 차에 시동을 걸면 스톱하라면서 뒷문을 열어재끼고 5인승 웨건에 올라탄다고. 그리고 그 이후로 나는 자동차 운전을 거의 그만 두었다. 경비에게 자동차 열쇠를 맡기면서 에스테이트다, 쓰려면 쓰라고 열쇠를 맡기는데 자기 차는 르노 캉구다 하면서 열쇠는 맡아두겠다며 번호판 번호를 적은 스티커를 붙여 열쇠걸이에 걸어놓을 뿐이었다. 아니, 왜 남의 일에 신경까지 써서 의미를 없애버리는 하유섬에 안 어울리는 인간을 만났다 싶어서 주먹이 쥐어진다. 이런 분노는 처음인데.
그 자식은 트램으로 출근하냐면서 그거 막히면 곤란하다고, 좀 안 뜯어버리나 하면서 나를 짜증나게 하더니 자동차 얻어타는 것은 자신의 권리라고 말했다. 그 자식을 주먹으로 치는 대신에 계약직인데 잘도 출근했다고 비아냥. 그 말에 그 자식은 자기는 정직원으로 승진한 몸이라고 말하면서 나를 본격적으로 가축 취급하려고 해서 자리를 떴다. 정식 사원이 아니어도 이건 못 참아. 그 새끼 이름을 고발하고 윗선에 말해버리려고 한다. 당한 지 일주일이라 씨알이 먹힐 것이다. 순진하기도 하지. 다음 날에 그 놈 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보자. 그리고 자리가 비어지고 내가 그 자리에… 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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