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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는 항상 그 자리에 있다. 그 자리에 있는 물가는 저기 숲 속에 솟아있는 봉우리 끝에 있는 용천에서 흘러나온다고 하지. 그리고 나는 고작 컵 하나를 들고 그 용천에 해당하는 여울오름을 오르고 있었다. 다들 컵 하나를 들고서 그저 여울오름으로 올라가는 나를 보고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돌리고 몇몇은 하유 사람들의 특기인 안색 살피고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딱히 나는 도움받을 일이 없어. 그저 컵 하나 들고 여울오름에 오른다! 그거 하나다! 여기로 여가를 즐기러 오는 모두가 나를 이상하게 보더라도 나는 꿋꿋이 정상의 여울오름을 향해 걸을 뿐이다. 그게 뭐 어때서 별스럽게 보는거지? 그런데 하나만 다른 점을 찾아보자면 나는 컵 하나를 들고 자동차도 1단 기어로 힘겹게 올라가고 걸어가다 포기하고 푸니쿨라를 타는 등산객도 많은 여기를 그냥 걸어서 올라가고 있다. 그게 그렇게 별난가? 눈치를 보다가 문득 힘들어져서 잠시 벤치에 앉는다. 그리고 여기까지 들고 온 컵을 바라본다. 흔하디 흔한 유리컵이고 산 지는 오래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컵을 바라보고 여기저기 쓰다듬다가 여울오름이 얼마나 멀었나 알려주는 이정표를 보았다. 아직도 많이 올라가야 하고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숨이 차오른다. 그리고 컵은 아직 내 손에 붙들려있다. 참 감사하게도 손에 붙들려있는 컵이 안전하니 나는 컵 하나 가지고 호들갑떠는 놈이 되어도 안전하다. 나의 목표는 오직 여울오름에 올라가서 컵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 같이 올라가주냐고 하는 것도 마다하고 등산할 때는 유리컵이 그닥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말과 푸니쿨라 몰던 차장이 잠시 세워줄테니 타고 가라는 것도 마다하고 나는 계속 위를 보고 걸었다. 언젠가 나는 답을 찾을거라고, 늘 그랬듯이 말이야. 그리고 멋지게 내가 여기까지 전철을 타고와서 힘겹게 산을 오르는 이유를 너희들은 몰라! 나보다 어리석은 중생들! 이 사바세계의 시뮬라크르 그 자체를 진실로 아는 새끼들아! 너네들이 내가 왜 유리컵을 들고 이렇게 올라가는지 내가 되지 않으면 모를 것이야! 내가 그 자체를 즐기는 것 같아보인다면 그건 아니고 이 유리컵이 나에게 딱히 중요한 물건도 아니야. 누구 유품도 아니고 나는 내일 화장터에서 가루가 될 운명도 아니고 딱히 여기 다른 일 때문에 왔다는 것도 아니야. 그저 나는 이 컵으로 여울오름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을 하려고 이렇게 오른다는 말이야.
그나저나 아무도 나를 상대해주지도 않던 어느 사이트가 떠올라. 닥치고 구경만 사흘을 했어도 반은 간다는 소리나 듣고 누구의 말을 그대로 옮기다가 조리돌림 당하고 딱히 뭐가 같지는 않지만 개그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 담겨있는 사이트였지. 그리고 나는 아직도 그 나에게 관심 눈꼽만큼도 없는 누군가들을 위해서 '여울오름 나우'라고 글을 올리지. 그리고 나를 쏘아보고 지나간 누군가는 '여기에 유리컵 손에 쥐고 등산하는 이상한 새끼가 있어'라고 글을 올렸는지도 몰라. 여울오름은 그냥 봉우리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 방해만 안 하면 내가 유리컵을 들고 산을 올라가든 재활용 화로도 아닌 곳에다가 유리컵을 던져넣고 아랫쪽에 엉겨붙은 유리결정을 다 깨부수느라고 치도곤을 치루든 아무런 상관이 없어야 옳은 것 아냐? 맞아, 이런 일도 있었다. 아까 말한 같은 사이트에서 누군가가 올리는 글에 누가 싫다 신경 쓰인다는 말이 올라와서 설마 그 대상이 나인가 하는 댓글을 올린 적이 있다. 하유에서는 주로 인형들이 안색을 살피며 괜찮냐고 불쑥 물어보는 것이 일상인사이기도 하고 충분히 말을 많이 나누니까 말이 통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글이 올라와 불안해질 때마다 상냥한 답장을 기다리며 설마 그게 나인가 답장을 올렸지만 어느샌가 그렇게 나를 의심하는 쪽에서 항상 당신은 아니다 답장을 주다가 그렇게 2년이 되던 차에 폭발해서 나를 차단하고 말았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 진짜 공포와 불안에 쉽게 휩싸이기 때문에 진짜로 내가 싫은 것이 아니고 다른 누구 이야기이다 하면 좋았을 것을 하고 남 탓을 하지만 그게 가능한가. 그래서 나는 그 사이트를 멀리하게 되었는데… 잠깐만 내가 뭘하고 있었지? 다들 나를 째려보고 유리컵 들고 등산이라니 이상해 하는 소리를 들었다. 으아아 과호흡이 도지기 전에 여기를 뜨자. 어차피 나는 정상까지 다 올라온 참이다.
죽을 것 같다. 하지만 눈 앞에는 여울오름 용천에 쓰레기를 버려서 용천이 마르면 하유국 전체 식수원이 쫑나니까 외국인은 최소 추방, 내국인은 최소 여권 정지 뒤에 외국 교도소에 갈 줄로 알으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그리고 이윽고 보이는 여울오름이 연못처럼 나타났다! 만세를 부르다가 뒤에서 쑥덕거리는 소리를 듣고 그만 둔다. 그리고 우선은 목이 마르니까 가지고 온 유리컵으로 여울오름의 물을 담아 마신다. 그리고 여기까지 같이 온 컵의 상태를 확인한다. 안 그래도 죽으려고 그러는 컵이 마지막으로 가고 싶어했던 여울오름에 와서 자기로 그 곳의 물을 떠다 마셔달라는 부탁을 들어주었어! 나는 그렇게 오늘 하고자 하는 일을 다 마치고 이제 유리컵의 마지막을 지켜줘야 하겠다.
그렇게 유리컵은 맨 바닥에 생긴 금을 따라 쫘악 쪼개져서는 행복한 최후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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