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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문/하유 배경의 이야기

잔인한 외출

두번의 봄 2020. 2. 4. 15:33

전철은 이내 남서주택단지역에 섰다. 개찰구를 나와서 카드를 찍고 지상으로 나온다. 트램이 없어진지는 좀 되었다. 그리고 트램이 없어지는데 대해서 나는 반대의견을 냈지만 주변에서는 저심도라도 해달라고 하는 통에 내 의견은 소수의견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멀리 보이던 바닷가를 이제 버스 차창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구나.

그 충격으로 내 집 앞의 도로를 보지 않으려는 버릇이 생겨서 매우 당황스러운 요즘, 아무런 감흥도 없이 이제 다른 곳과 비슷하게 변해가는 하유섬을 우려하면서도 그게 시대의 부름이라면 하고 단념한다. 아무리 섬이 작아서 버스로도 한 바퀴 돌 수 있다고 해도 굳이 트램을 없애야 했나 하는 것 때문에 나는 이미 마음도 내 집 대문도 걸어잠갔다. 아무도 이제 열지 못하리.

그리고 며칠 후, 누가 감히 내 집 대문을 두드렸다. 꺼지라는 소리에도 놀라기만 할 뿐, 가만히 있는 인형놈이 무언가를 주고 간다. 이 나라에서 스튜 냄비를 받는다는 것은 혹시 밥을 굶지않을까 싶어서 선심을 쓰고 간다는 의미라 일단 받는다. 하지만 남서해안의 모두가 트램을 없애는데 동의했다는 것 하나로 나는 환멸했다. 참나, 무슨 지하 쇼핑몰도 아니고 자동차를 가지고 다니는 너네나 편하자고 그걸 지하로 묻어버리다니. 스튜는 닭고기로 만들어졌고 간이 세지 않았다. 그리고 냄비는 어쩌지.

스튜는 사흘을 먹었다. 하지만 냄비가 문제였다. 어떠한 쪽지도 없고 기억하는 것은 나에게 이 냄비를 넘긴 주체는 인형이라는 것 하나. 마을사무소로 가면 또 트램을 없앤 것 때문에 버럭거리러 왔구나 싶어서 갈 수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트램을 뜯어버리고 지하화 공사가 막 시작되던 때에 나는 복공판 위에서 쿵쾅쿵쾅 뛰기도 했고 마을사무소에서 누가 지하화에 동의했냐고 눈을 부라리고 말해서 나를 말리러 나온 사무소장에게 권위주의자라고 욕을 하고 멱살을 잡고 따귀 때린 적이 있어서 절로 이마에 손이 올라간다. 주민 중에 인형이고 주로 갈색 외투를 입는 누군가가 있냐고 물어보려는 것이 이렇게나 힘든 일이 되었는데 그게 다 내 잘못이고 또한 내가 나오지 않으면 그 무엇도 되지 않으니 힘들 뿐이다.

그렇게 트램을 묻어버린 녀석들과 상종하기 싫어서 밖으로 나가지를 않는데 계속 이렇게 있다가는 냄비를 돌려줄 수 없게 된다. 냄비를 돌려주려면 밖에 나가야 하고 밖으로 나가면 재수없게도 트램이 말끔하게 뜯긴 도로를 봐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을 건너서 마을사무소에 이 마을에 사는 인형들의 집을 물어봐야 하고 그 각각의 집을 다 찾아다녀야 한다. 그러기 정말 싫었다. 모두들 나를 괴팍한 인간으로 알고 있을 것이 뻔하다. 그리고 바로 경찰에 넘겨서 그 동안의 죄값을 받도록 하겠지. 그러면 나는 아마도 여권 정지 상태로 외국 교도소에 갇혔다가 돌아올 처지가 될 지도 모른다. 그런데 냄비는 벌써 며칠 째 돌려주지 못하고 있고 나에게 저 냄비를 넘긴 인형 녀석은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면 어째야 하는가. 일단은 나가야 한다. 모든 것을 극복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 과정이 쉽지가 않다. 도로는 트램이 뜯긴 뒤로 불타서 뜨거운 철판과도 같고 마을사무소는 사형집행소와 같다. 그런 가운데서 인형들의 집을 찾으면 뭔가 범죄를 저지를 사람 같을거고 냄비 주인인 인형을 찾아가서 냄비를 돌려줘도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나에게 소금을 뿌릴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뭐, 어쩌라고. 이제 방도가 없어졌다. 일단 대문을 나가서 길을 건넌다.

길가의 자동차들이 급브레이크를 밟고 나에게 경적을 울린다. 성질 급한 놈은 상향등을 쳐올린다. 미안해. 그런데 이 길을 이렇게라도 건너지 않으면 나중에는 횡단보도로 건너지도 못할 것 같았어. 그리고 바로 시험정원의 바로 옆, 마을사무소로 박치기. 문을 부수지 말라며 제지당하고 대신 문을 열어주는 누군가에게 감사인사도 못하고 번호표 뽑고 숨을 거칠게 내쉰다. 진정하라고 하면서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한낱 구경거리 끝나니까 고개를 돌려 자기네들 일을 본다. 예상과 많이 다르다. 그렇게 내 차례가 되어 냄비를 돌려줘야 하는데 여기에 인형이 사는 곳은 어디어디냐 묻자 그건 알려줄 수 없는 것이라고 하고 다만 주거가 확인된 집들을 표시해줄테니 찾아보라고 한다. 그리고 누군가 사는 집이 표시된 지도를 가지고 마을사무소를 나온다.

그렇게 냄비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과호흡이 도져가면서까지 남서해안을 둘러다녔다. 대부분은 초인종 소리나 노크 소리에 반응하고 나왔지만 냄비 돌려받을 일은 없다고 말하며 매정히 문을 닫았다. 그렇게 누군가 사는 집 스물다섯 중에 열다섯 정도를 들러서 냄비 주인을 찾던 중에 누가 내 볼을 찌르는 장난을 친다.

내가 찾던 냄비 주인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니까 이제 트램이 없어지건 말건 상관없이 밖은 나올 수 있게 되었는데 아직도 내가 한 잘못에 대해서는 모두에게 사과하고 싶지만 용기가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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