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과도 같지만 애매하다. 여기에 한시도 있기 싫다. 빨리 비자 기간을 줄여주고 본국의 의사를 불러 줘. 여기는 역시 삶을 영위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세트장이야. 다들 나를 위해 연기를 하고 있다고. 여기에 나를 보낸 새끼, 귀국하면 조각을 치겠어. 내가 여기로 발령난 것이 어언 3개월 전이다. 아마도 원예산업이 발달한 곳이니 마음도 가라앉힐 겸해서 정원에 갔다오라는 말이 여기로 귀양가라는 말일 줄은 상상도 못 했고, 또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렇게 비행기로 다섯 시간을 날아서 하유라는 외딴 나라에 도착하고는 처음 들른 카페에서 종업원들이 나는 컨셉을 잡고 움직이는지 알았고 전철을 타고 북동쪽의 사무실로 향하는 와중에 플랫폼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새하얀 소년이 내 상사라는 말에 또 놀랐으며 그..
비가 오고 있다. 일본어가 강세인 이 거리에서 나는 무슨 생각으로 서 있을까? 그것도 우산도 쓰지 않은 채로 말이다. 북동보다 남쪽으로 남동구에 속하는 이 곳에서 뭐를 하고 싶었을까? 제대로 거절하지 못하고 처음 뵙겠다고 야옹거린 그게 전부다. 생각은 아무것도 들지 않는다. 그저 나아가고 싶은데 안 된다. 그게 다다. 뭐가 좋은건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고 싶어. 그리고 애매하고 우울한 여기 사람들의 본성이 나에게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하고 서로서로 자기만의 섬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느낌만 심하게 들어버리는 것이 나는 지독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작정 택시를 잡는다. 깨져버린 것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는 생각도 하고 비 오는 카페 창가에서 오늘도 기다리지만 안 돼. 여기 사람들은 절교하면 다시..
문득 잠에서 깼다. 왜건의 트렁크를 열고 뒷좌석을 다 젖힌 뒤에 매트리스를 깔아놓은 아늑한 잠자리에서 일어나 상록숲 안 쪽의 호수에서 눈을 뜬다. 너무 늦게 잤나, 뻐근하다. 뒷좌석에 만들어놓은 잠자리를 치우고 식사를 하러 자동차에 시동을 건다. 사실 이 자동차, 하유국에서 디젤을 못 태우게 해서 기름 다 빼고 들여와서 정비만 했는데 얼마 전에 블루크루드인가 뭔가가 풀려서 정말 한가로이 캠핑을 즐기고 있던 중이었다. 여기, 상록구는 온통 숲이다. 북서쪽으로 달려 경계선녹지가 나오고 북서구 표지판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무래도 행정구역 하나를 이렇게 숲으로 나두고 가장 키 큰 나무보다 높은 건물을 못 짓게 하는 그것이 참 마음에 들었지만 자동차는 석유를 태운다며 시동 거는 순간부터 추방이라길래 오늘같..
무료함은 언제나 그렇듯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지루해서 출퇴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따금씩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언덕으로 가거나 전철에 기대어 너른 사탕무밭이나 숲 속으로 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만큼이나 평온하고 집에서 메이드 놀이를 계속하는 루미와 계속 마당에 찾아오는 하얀 냥이와 장난치며 자동차는 잘 있냐면서 놀리는 앨리, 어째서 요새는 차를 잘 안 몰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공영주차장 경비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전부다. 이제 그 모든 설정이나 요소의 틀에서 벗어나 꽤 자유롭게 움직이는 소설 속 주인공이 된 상상도 해보고 유령에게 푸딩을 요구당하거나 일종의 인형이 되어 주인님에게 사랑받다 버려지는 상상에 빠지고는 에스프레소 머신에 손을 델 뻔했다. 그리고 나리는 조심하라면서도 혀를..
신기한 일들은 그렇게 쉭쉭 지나가고 진짜 그곳에 암초가 있는지 확인하려 구태여 남동 바닷가에 가보기도 하고 나리에게 인형 마녀를 만난 얘기를 하니까 그런 애였냐고, 왜 여기를 그렇게 소문냈는지 모르겠다고 짜증을 내긴 했어.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딱히 없는 보통 하루가 흘러갔다. 카페는 평소대로 손님이 없고 숲은 가깝고 심심해서 켜본 뉴스에서는 먹을 것을 안 축내는 대체에너지 제작 공정을 도입한다고 해서 피셔-트로프슈 합성이네 뭐네로 시끄러웠다. 그리고는 이제 곧 비식용 바이오매스 연료화 공정이 도입되니 연료사용제한을 피셔-트로프슈 합성법으로 제조한 블루크루드에 한해서 풀어버린다는 보도였다. 나는 우려스럽지만 따르라면 따라야지. 한 번은 프로판 창고가 터져서 미세먼지로 죽어났던 하유섬이 갑자기 유하게 변한..
마음은 무너져요. 그냥 그렇게 무너져서는 아무 것도 그 무엇도 아닌게 되어버려요. 겨우 무언가가 된다고 해도 그게 끝. 저는 그렇게 아무 것에도 기대를 가지지 않게 되었답니다. 쓰레기 청소. 그게 해야 할 일이면 해야죠. 하지만 주변에 뵈는 것은 쓰레기들. 청소를 하다보면 쓰레기들이 저보다 위에 있기도 하고 이상하게도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는 저를 만만하게 보고 같이 쓰레기 하자고 조르죠. 같이 쓰레기 하자는 쓰레기에게 저는 곤란한 표정으로 빗자루를 휘둘러요. 그래도 쓰레기가 죽진 않아요. 신기하죠? 아무래도 저는 오랫동안 잠들어 버리는 편이 모두에게 도와주는 것이지만 그것도 이루기가 힘드네요. 쓰레기 본연의 세상에서 쓰레기들과 섞여서 같이 버려져야 하는 것이 세상이라면 차라리 세상에서 지워지는 것이 저..
하유국 외무부는 최근, 외신들이 '하유는 평행세계의 싱가포르'라고 표현한 데에 강력한 유감을 표시한다.하유국 정부는 개국 초기에 일본, 한국, 북조선, 대만, 중국 등과 수교하며 '첫 수교의 빌딩'에 그들의 대사관 및 대표부를 마련하고 한국, 일본과는 '하일한 상호 동반자 협정'을 체결, 상호 3개국 간의 여행사증 면제와 무역과 교류 편의를 도모함으로서 그 이듬해에는 국제연합에도 가입하는 등, 적극적이고 포용적인 외교행보를 보여왔다.허나, 하유국 국체를 3권분립도 애매하며 아직도 검열이 만연하고 파업과 시위도 단 하나의 장소에서 엄격한 통제 아래에서만 가능하고 노조는 불법인 싱가포르에 빗대는 일부 외신의 행태에 대해 하유국은 그저 와신상담하며 굴복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내보이게 되었다.하유는 상냥함이 이..
하유국은 작은 섬나라일까 아닐까 한다면 일단 맞다. 초반에는 1,210.5㎢ 면적의 섬 하나에서 시작해서 점점 불어나가는 그런 셈일테다. 일단 중심되고 이야기의 중앙에 있는 땅덩어리, 하유섬은 작은 섬이고 이 섬의 기후는 애매하다 못해 일단 상춘기후와 냉대습윤기후의 특징이 섞인 하유국만의 기후를 가지고 있어서 언제나 봄 가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일 년내내 계속되는 서늘함이 특징이다. 하지만 그 특징을 정말 전형적이면서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섬의 날씨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한 번 정도 살아보곤 학을 떼고 도망가버린, 아무도 살지 않는 사실상의 무주지였다가 결국에는 그 섬의 북서쪽에 누군가 다시 상륙하고 몇 시간 뒤, '하유'라는 나라가 세워졌다. 그렇게 세계 표준시보다 10시간이 빠른 시간이 흐르는 작은..
은빛이 도는 하얀 인상에 비단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가진 요정 혹은 인형 소년. 어딘가의 섬에 숨어살고 있다. 꽤 귀엽게 생겼다고 듣지만 자신은 그 말을 싫어하는 모양. 기본적으로 상냥하거나 착한 성격이지만 그에 나사가 빠져서 얼빠져보인다. 적당히 말하면 도움이 되지만 너무 말해버려서 폐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고 자신의 말재주가 모자른 이유가 다 자기가 멍청한 탓이라고 생각하며 굉장히 싫어한다. 그래서 말하는 것에 대해 겁이 많은 편이다. 거절을 잘 못한다. 기본적으로 순하고 착해서 사람들이 다가오는 편이지만 한 번 누군가를 싫어하게 되면 차갑게 변해버린다. 하지만 꽤 귀염성이 있어서 누군가 호의를 가지고 다가오는 경우가 많지만 기본설정이 망가진 덕분인지 호의 속의 악의를 걱정한다. 굉장히 순하고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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