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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문/하유 배경의 이야기

캠핑

두번의 봄 2019. 6. 3. 16:39

문득 잠에서 깼다.

왜건의 트렁크를 열고 뒷좌석을 다 젖힌 뒤에 매트리스를 깔아놓은 아늑한 잠자리에서 일어나 상록숲 안 쪽의 호수에서 눈을 뜬다. 너무 늦게 잤나, 뻐근하다. 뒷좌석에 만들어놓은 잠자리를 치우고 식사를 하러 자동차에 시동을 건다. 사실 이 자동차, 하유국에서 디젤을 못 태우게 해서 기름 다 빼고 들여와서 정비만 했는데 얼마 전에 블루크루드인가 뭔가가 풀려서 정말 한가로이 캠핑을 즐기고 있던 중이었다.

여기, 상록구는 온통 숲이다. 북서쪽으로 달려 경계선녹지가 나오고 북서구 표지판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무래도 행정구역 하나를 이렇게 숲으로 나두고 가장 키 큰 나무보다 높은 건물을 못 짓게 하는 그것이 참 마음에 들었지만 자동차는 석유를 태운다며 시동 거는 순간부터 추방이라길래 오늘같이 블루크루드가 생산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블루크루드 생산판매 개시가 되는 시간과 제일 가까운 장소를 맞춰서 자동차를 끌고와 이렇게 상록숲을 달리고 있다. 그리고 숲길을 벗어나 북동구 표지판을 지나면 펼쳐지는 아기자기한 카페들이 있고 그 중에 드라이브스루가 있는 카페에서 에그 베네딕트와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을 사고 한 바퀴 돈다. 마땅히 돌아갈 곳이 없는 탓이다. 그래, 나는 이 차가 내 집이다.

거의 노숙자로 사는 것도 힘들어 그저 정원으로 꾸며진 섬나라에서 살아볼 작정으로 나의 왜건과 함께 하유국에 왔지만 공무원 녀석들이 왜건 연료가 무엇이냐고 묻는 동시에 내 차에서 연료통을 떼서 기름을 모두 뺀 뒤에 나에게 돌려주는 꼴이었다. 나는 경악해서 왜 그러냐 했더니 정원국가의 방침이라며 전기와 대체연료 아니면 시동을 걸 수 없다네. 그리고 디젤차를 갖고 온 죄로 집은 줄 수 없다며 내 차와 나를 상록숲에 버린 것이다. 하지만 원망하지 않는 이유는 왠지 이 놈의 숲에 나 같은 놈도 사람으로 쳐주는 요정과 인형이 있어서 차는 고장나지 않게 수리도 할 수 있고 굶어죽지 않게 이 숲에 뭐가 먹을 수 있는거고 뭐가 맛있는지 어디에서 씻을 수 있는지 다 알려주더군. 그래서 시동도 못 거는 차를 집 삼아서 오랫동안 캠핑을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향한 곳은 북동쪽의 카페. 수염이 덥수룩하고 왜건을 모는 아저씨라서 그런가, 종업원이 겁에 질리더군. 그리고 북동구북단에서 고속도로로 올라가본다. 그래, 이거지. 나는 자동차를 몰고 뭐든지 할 수 있을거란 자신감에 어느 한 구석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을 잘 수 있을 만한 장소를 찾아 트렁크를 열고 자리를 깔았다. 어느 농장의 근처였는데 호기심 많은 아이들을 만나는 것은 영 성가시단 말이지.

일단 잠은 잘 잤으니 다시 시동을… 아차. 기름이 얼마 없다.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 주유소를 찾는 것이 급선무다. 하지만 대부분은 충전소고 블루페트롤이니 블루디젤이니 취급하지 않는다. 어쩌겠는가, 찾는 수밖에 없다. 찾다가 기름이 다 닳으면 견인차를 불러야 하지만 내 차가 너무 커서 통째로 들어야 한다며 난감해하는 기사도 있고 설마 차 안에서 사는 퉁수라서 그렇게 괴팍한가 하면서 싸움을 걸어온다면 큰일이다. 나도 곤란하고 그 이도 곤란한 처지일 것이니.

농장 사무실에 들러서 근처에 디젤을 파는 주유소가 있냐고 하자 누가 하유에서 디젤을 태우냐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나는 기분이 퍽 나빠져서 아니, 이민을 와서 자동차 외에는 자산이 없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유일한 자산인 자동차가 경유를 태운다고 기름탱크를 다 비워놓고 이제야 블루크루드다 피셔-트로프슈다 하면서 풀어줬는데 누가 뭐라 할 처지쇼? 그런 얘기의 끝은 그가 나에게 총 소리로 겁을 주어 쫓아내는 것으로 끝이 났다. 디젤을 태우는 환경파괴범이라고!

결국 견인차를 불러 디젤을 파는 충전소에 도착했을 때, 해는 져 있었다. 이렇게 끝없는 캠핑을 하면서 오늘은 충전소 주변의 나대지에서 자야지 하고 트렁크를 여는데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아이씨, 알겠소. 당장 차를 빼지 않으면 휠록을 걸겠다고 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날이 새서야 잠들 수 있었다. 기본적이고 난감한 상황은 무료라는 하유국의 은혜 덕에 견인차 비용은 내가 내지 않아도 되었지만 해가 떠있는 시간에 잠드는 것은 내가 노숙을 하는 신세여도 힘들다.

그리고 눈이 떠졌을 때, 누군가 나를 장난스러운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난감하신가요? 장난하냐? 난감하다 못해서 미쳐버릴 지경이란다. 그렇게 싱글싱글 웃던 아이는 앗 하더니 나에게 무화과가 담긴 바구니를 준다. 나 먹으라고? 끄덕. 무화과를 먹으러 고개를 잠시 숙인 사이에 아이는 사라지고 아이가 사라진 자리에 기름 말통이 놓여있었다. 음, 그래. 도우미 요정을 만났구나. 잠자리를 정리하고 말통을 뒷좌석에 싣고 출발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클러치가 미끄러지고 육갑이야. 애석하게도 클러치는 내가 스스로 고칠 수도 없고 그냥 놔둘 수도 없고 싸게 고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냥 반클러치를 더욱 섬세하게 잡는 수밖에. 편의점에서 산 식사와 커피로 점심을 때우고 오늘도 나아간다.

아마도 계속 나는 캠핑을 하다가 죽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