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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루가 지나버렸다. 집 앞을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는 시끄럽고 비까지 내리며 오늘도 푸른 요정 녀석은 창가를 보며 비 오는 날이 맑아서 좋다고 노래한다. 그나저나 아직 잠이 반쯤 깬 상태로 소파에 누운 나는 다시 잠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노랫소리가 멈춘다. 요새 심해진 불면과 불편이 잠들지 못하게 하는 마법으로 와서 편히 잠들지 못하는 나에게 '폭신하고 촉촉하게 잠들 수 있고 좋은 꿈을 꾸게 해줄게' 하는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와 차갑지만 보드라운 손이 내 이마에 올려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목소리가 우리 집 우울한데다 무료한 푸른 요정이지만 모르는 척해보자.

조금씩 편히 잠에 빠져들었다. 포근하게 들어간 꿈 속에서는 환하게 웃는 귀엽고 수줍은 아이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 나서 그 아이가 이제 가야 한다면서 덧없어하기에 옷자락을 붙잡았지만 소용 없었고 그 아이는 손을 흔들며 어둠 속으로 삼켜져버렸다. 그렇게 울며 깨어나니 푸른 요정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는데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한다. 어쩔 수가 없어. 슬픈 꿈을 꾸었단 말이야. 푸른 요정은 창가로 시선을 돌리더니 비가 방울방울 귀엽다며 같이 창가에 있자고 권했지만 우울하게 있기 싫어서 사양한 뒤에 잠시 나갈거라며 준비하자 나에게 이거 가져도 좋아라고 나에게 뭔가를 쥐어준다. 그저 주머니에 넣고 나가니 호에에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이유를 모르겠어.

집 앞의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무료함을 느끼다가도 어느 순간에 사르르 녹는 마음을 느끼게 되지만 그게 무슨 느낌일까 하며 문득 푸른 요정이 준 무언가를 주머니에서 꺼내본다.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파란색 드롭스. 하나를 입에 넣고 조그만 버스를 타고서 중앙으로 나와 전철로 갈아타도 그저 무료함이 가시지를 않아서 왠지 여기에 내가 왜 타고 있지 하는 느낌도 받았고하니 이렇게 의미없는 여행이라면 가다가 마음에 드는 역에서 내리자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문득 이름이 예쁘다고 생각한 목서로역에서 내렸다. 너무 멀리 온 것을 안 것은 내린 역에서 조금 걸어나오니 온통 밭인 것을 보고 알아차렸지. 별 수 없는 호기심에 바로 역 앞의 정류장에 멈춰선 작은 버스를 타고 그냥 목적지 없이 가는 도중에 나는 숲 속으로 들어가는 미니버스 안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우중충하게 비 오는 숲은 무서웠고 그 숲 속에도 정류장은 있는데 타는 이도 내리는 이도 없어 문만 여닫고서 쌔앵 내달리는 그 느낌도 무서워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눈 뜨고서 겨우 숲의 끝을 보았을 때, 다음 정류장은 마을일 줄로 알고 하차벨을 울렸다.

정류장 이름은 '북동카페거리'. 말 그대로 카페들이 즐비한 예쁜 거리지만 뭔지 모를 공포감을 느꼈다. 여기가 바로, 인형들이 살고 있다는 그 북동과 숲의 경계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해는 지고있고 비는 방금 그쳐서 추웠다. 하지만 무서웠기에 더 추웠다. 그렇게 헤매이던 즈음, 어떤 소녀와 마주쳤다. 그리고 나는 화들짝 놀랐다. 유리빛 옅은 회색 눈동자의 인형이었기 때문에. 길을 잃었냐면서, 가끔씩 그런 사람이 생긴다며 카페는 이미 닫았지만 특별히 열게요라고 말하는 인형을 따라가면 나도 인형이 될 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따라갔다. 그리고 '인형괴담 때문에 그러는 거, 다 아니까 무서워 말아요' 하면서 그 괴담이 사실이 아니고 자신도 나를 인형으로 만들지 않는다며 안심시켰다.

하지만 카페로 가기에는 시간이 늦었다. 그래서 '카페로 가는 것은 아닌 것 같아. 근처 정류장이나 역을 가르쳐줄래?'라고 말하자 그 아이는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언제 또 여기에서 길을 잃을지 모르니까 연락처라도 주고받아요'라고 말했다. 미안해서 그렇다고 쳐도 연락처라니. 서로의 휴대전화에 각자의 번호를 저장하고 확인까지 끝난 뒤에야 그 아이는 자기 이름은 나리이고, 잘 부탁한다면서 정류장으로 데려다주었다. 막차 시간은 아니니까 마음 놓고 잘 도착하라면서 헤어진 정류장은… 내가 버스에서 내려 헤맸던 '북동카페거리 정류장'이었다. 얼마나 무서움에 떨었는지 정류장에서 10분 밖에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서 길을 잃었다 생각한 내가 바보같았다. 버스는 그렇게 목서마을까지 굴러갔고 어찌저찌 막차 시간 바로 전에 집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쌀쌀한 날씨의 교차로에서 멀뚱히 서 있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 하면 이제 노는 것도 질린다는 것이다. 일은 해야 하지만 귀찮고 시간에 쫓겨야 하는 일이니만큼 버겁다. 일자리 찾기는 그만 둔 채로 이제 어느 이야기를 또 꺼내야 하나 고민하며 횡단보도 건너다가 성미 급하게 직진하던 자동차에 치일 뻔했다. 그저 손을 머리 위로 멋쩍게 들고 뒷걸음질 칠 뿐이고, 한숨 나오는 어느 풍경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갑자기 앞으로 지나가는 것들이 너무 신경쓰일 뿐이라서 길을 건너거나 하지 않는다.

그나저나 예전부터 있었던 노면전차도 도로 한가운데의 철길을 따라 시험정원이나 남서중앙역이나 동백마을로 향하거나 하는데 모르겠다. 사람들은 뜯어내라고도 하고 아니다, 상록숲에서도 다니는 전차이지만 숲이 아닌 마을을 달리는 전차이고 싫으면 같은 경로를 다니는 버스 타라고 주장하는 서로가 뭔가 싶은데 나랑 관계 없어. 오늘 마을회의에서도 그런 일로 싸웠다는데 그냥 흠이다. 나는 지금 그걸 타고 마을의 한 가운데, 남서중앙으로 나가면서 뒤따라오는 버스를 재미있어 할 뿐.

이러나저러나 목서로역에 전철이 선다. 개찰구를 지나 나리에게 전화를 건다. 나리네 가게를 찾아갈 생각이다. 나리는 목서마을이면 역 앞에 정류장이 있는데 버스나 트램이나 경로는 같으니 먼저 오는 것을 타란다. 이왕이면 번호 잘못 봐서 잘못 가기 싫으면 트램 타라는 조언도. 가게 이름을 '네스토 데 피고'라고 가르쳐 주었는데, 왠지 까치가 반짝이는 것을 자기 둥지로 채가는 것과 같이 기름진 음식을 딱딱하게 구운 과자 위에 올린 '파이' 혹은 '타르트'라는 음식을 떠올렸다. 과연 타르트를 팔 것 같은 이름이다. 그리고 어느 무료한 관종은 그렇게 길 잃은 곳에서 만난 친구를 찾아가고 있었다는 얘기.

서로 눈을 마주치자마자 진짜로 여기 온거냐고 놀라며 돈 안 받겠다며 호의를 보이는 나리가 미심쩍었다. 무슨 속셈일까 하며 돈을 내겠다 했는데 그냥 말 없이 제일 잘 나간다는 산딸기 파이가 내 눈 앞에 놓이는 광경을 보았다. 제대로 집에는 갔냐고 물으며 커피도 곧 나올테니까 하는 나리에게 시벌탱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 커피는 내 앞에 놓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말하지도 않았는데 저 인형은 독심술을 하나 싶은 대목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지켜보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는다. 당황했지만 지금 이 시간에는 원래 주문 안 받는 시간이라 된다나. 나를 보고서 '일 안 하고 있는거 다 안다'라고 쏘아붙이는데 그럼 무엇을 알려주려는지 말을 하라고. 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으면서 메모지와 펜을 꺼내 뭔가를 적어 나한테 넘겨주고는 돈 진짜 안 받을거라며 먹고 메모에 적힌 곳에 가보라네. 아아.

덜컹인다. 오히려 그 메모에 적힌 장소로 가는데 버스가 더 빠를 것 같아 타긴 했는데 진짜 오래걸린다. 어차피 남서중앙에 있는 '영점'이라는 카페에 가보라는데 손해보는 셈치고 한 번 가보자 싶어 북동에서 남서로 바로 내려오는 버스에 허리 아프게 왔다. 그리고 '영점'을 찾은 순간, 내가 있는 곳이 남서중앙이 맞나 의심했다. 주변 가게랑은 달리 망해가는 느낌이 강했다고 해야 맞을 것 같은 모양새의 가게의 문을 비집고 실례합니다. 누가 한숨쉬며 '일하러 왔나요' 하면서 당장 나를 고용하겠다 했다. 좀 수상쩍었고 그런데 일단은 일자리가 필요하다. 그래도 수상하다.

우선은 전화로 망해가는 카페라고 따졌다. 그럴 입지가 아니라고 하고 사진 찍어 보여줘도 믿지 않는다. 북동쪽 인형들은 실제를 왜곡해 보는 기능이라도 달려있는지 반신반의 하며 집에 돌아간 하루가 지나 다음 날, 영점으로 출근한 나는 그 사람이 앞으로 못 받을테니 받으라며 돈봉투를 내놨다. 받든말든 네 돈이다 싶은 생각인지 툭 떨궜다. 아무도 영점을 찾지 않았다. 그래서 스팀이 안 나오는 커피머신을 점검하던 찰나에 누군가 들어온다. 갑자기 카페 '영점'의 주인은 올 게 왔다며 탬퍼를 들고 그 자식들 머리를 찍으려 한 모양인데 탁 소리를 내며 그를 저지하는 인간들은 세무서 직원이었다.

탈세라니. 자기는 뭣도 안 되는 사업하면서 세금을 내기도 힘들다는 항변을 하면서 체납된 세금을 죽어서 갚으면 되겠냐고, 나는 뭘하든 망한다 하는 말은 세무서 직원들을 화나게 한 모양이다. 일단 청사에 가서 얘기하자며 그를 끌고간 후, 나도 강제로 내쫓겼는데 곧 영점의 문에는 이 가게가 탈세동결자산이라는 것을 알리는 쪽지가 붙어 다시 열리지 않게 되었다. 세무서 자동차가 정부청사 쪽으로 떠나기 전까지 나는 멍하니 있었다. 이런 급전개, 당황스러워.

이 상황을 안 믿겠지만 우선 탈세동결자산 안내문을 찍어서 나리에게 보내자. 예상대로 바로 전화가 온다. 네가 찍은게 거짓말은 아닐테지만 진짜냐고 물으며 이마를 세게 짚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정도인 줄은 몰랐고 적당히 내가 일할 수 있을 만한 곳이라서 알려줬는데 어쩌냐고 막 답답해하는 이 아이를 찾아가면 곤란하겠지. 이제 정말 끝이라며 더 이상 도움 못 주니까 미안하다고 하는 소녀인형의 말은 이제 끝. 그리고 뒤를 돌아보니 봄이가 무슨 일 있냐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갸웃거렸다. 놀랄 뻔했지만 그다지 강도가 크지 않으므로 소년인형을 놀라게 하지 않게 굳이 표현하지 않는다. 그게 좋겠지.

전차 선로를 따라 걸어서 도착한 바닷가. 언제나 바다는 답답함을 풀어주는 마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 어떤 심약한 소년인형과 한심한 실직자는 멍하니 바다만 봤다. 하지만 바다만 보면 백치가 될 것 같아! 나는 이렇게 질렀고 소년인형이 나를 가볍게 노려보고 기운내라며 자기 집으로 가버리고 동시에 무작정 자리를 떠서 원예연구소의 시험정원인 이 공원에서 여러가지를 보았다. 냉대기후에 적응한 차나무와 로즈메리, 좀 더 향이 짙은 라벤더와 열매가 떫지 않고 냉대기후에서도 자라는 파초같이 생각해 봄직 하지만 실현이 어려운 식물들이 이 나라를 받혀세우며 잘 자라고 있다. 이 나라의 주력상품이라던가.

어디 있던지 오늘은 질리는구나. 또 시험정원 앞에서 중앙의 번화가로 가는 노면전차 안에서 동네와 바닷가를 바라보며 가는 느낌은 버스와 다르다. 예전에 이 나라에 궤도교통 필요없다는 다수 의견을 무시하고 일단 원예연구소에서 시험정원까지 모종을 안전하게 옮길 필요가 있다는 핑계로 지어진 이 궤도는 아직도 마을을 가로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