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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철길을 따라서 가는 화차의 안에는 사탕무가 한 가득 찼고 그렇게 오늘 일도 마무리되었다. 내 집은 여기에서 전철로 좀 더 가야 있는 상록숲 안의 오두막. 그래서 막 도착한 여기에서 친구 삼고 있는 토끼와 고양이를 쓰다듬어 주고 받아온 일당과 설탕 한 포대를 다락에 밀어 넣는다. 주워놓은 나뭇가지로 난로도 켜고 이제 저녁을 요리할 시간. 아아, 피곤하다. 사탕무 밭에서 잘 여문 것을 골라서 뽑느라고 여기저기가 더 마모되는 기분이 든다. 인형이라고 해서 덜 피곤한 것도 아니고 그저 요정과 사람의 가까운 이웃 수준으로 지내다보니 기계장치로 인해 벌어지는 서로의 체력차이를 제외하면 별 차이 없지만 오늘은 유독 더 피곤해서 물을 긷으러 가는 것을 미뤘다. 그런 불편함도 상록에서 사는 즐거움이니까.
다음 날도 전철에 올라 공장 안으로 들어가고 전철 철길보다 폭이 더 좁은 궤도차로 갈아타고 오늘의 수확을 시작하나 했는데 누군가 작업중지를 외치며 우리를 어딘가로 데려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룻밤 사이에 밭 한 귀퉁이가 절단난 것을 발견했다. 다들 어떻게 된거냐고 허탈해 하며 나에게 멀리 보인다면 토끼라도 있나 봐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이 밭에 토끼 한 마리 정도만 있으면 저도 찾기 힘들어요 솔직하게 말하니 다들 울상이 되고 말았다.
토끼가 있는지 없는지는 그래도 덜 지치는 체력의 내가 맡게 되어서 다행인데 이러다가 체력이 다 되면 난감해져. 빨리 토끼를 발견하면 잡아서 숲 속에 풀어줘야 하는데 토끼는 두 시간이나 찾아도 보이지가 않고 힘도 빠져가서 동료에게 일을 교대해달라고 하는 와중에도 밭 한 귀퉁이가 왜 절단났는지는 더더욱 오리무중으로 빠졌다. 덕분에 제당조는 원료반 뭐하냐고 원료 내놔라 외쳐대지만 '원료반 무전 드립니다: 밭의 한 귀퉁이부터 절단나서 토끼라도 들었나 확인 중입니다.'
그러자 상근조 돌연 '대답합니다: 어제 비 왔습니다.'
어라? 비가 왔다고요? 네. 그럼 카피.
비가 왔었다고? 어제, 퇴근하는 전철 안에서도 비구름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내가 사는 집은 오두막이다. 비가 왔으면 이 근처 오두막에 사는 내가 비 새는 와중에 밤도 새서 알았을 테지만…
상근조 대답하세요: 정말 어제 비 왔어요?
'상근조 대답합니다: 밭이 절단난 것은 폐쇄회로 확인하시고 진짜로 비는 왔습니다.'
아 예, 카피. 과연 폐쇄회로 카메라가 밭이 절단난 것을 얘기해줄까. 궤도차가 저 멀리에서 돌아오고 이상 무를 외친다. 역시 절단난 곳은 한 귀퉁이에 불과한 모양이다. 일이 많이 늦어져서 벌써 퇴근해야 하지만 제당조에게 물어보니 일단 일을 미룬다는 생각을 했다니 다행이라고, 내일 초과수확을 하자고 하고 오늘은 전부 해산.
하지만 진짜로 해산하는 바보는 없다. 집에 돌아가는 대신에 다시 동료들과 폐쇄회로를 어제 저녁무렵에 퇴근하고나서 시간부터 돌려보았다. 뭔가 나왔어요? 상근조는 경계근무도 서잖아요. 그런데 요정이나 위장 쓰는 인형 녀석들은 어째 못해. 나도 의심하는 건가 화를 내기도 전에 뭔가 화면에 비치는 것을 봐서 잠깐만 앞으로 돌려보라 외친다. 테이프가 돌아가면서 어떤 허수아비 형상이 나타났다. 요정? 확실하지는 않지만 매복자세로 있다가 잎사귀가 있는 쪽을 발로 밟고서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는 꼬챙이로 사탕무를 절단내는 장면, 그리고 쇠사슬에 매단 낫을 휘두르며 밭을 절단내는 장면이 찍히고는 뽀옹하고 사라진 그 자리에 밭을 계속 절단내던 쇠사슬에 매단 낫이 떨어질 뿐이었다.
그 자리에 상근조와 향해보니 사슬낫이 있긴 있었고 끊어진 끈 조각과 이리저리 상처입고 심하게 찢어진 사탕무가 너덜너덜 심겨져 있을 뿐이었다. 물증을 확보했다며 경찰에 우선 신고해요 하는데 신고를 하던 사람 동료의 손을 툭 쳐서 폰을 떨어뜨리고 도망치는… 소녀? 나는 죽어라 뛰어서 그 소녀를 잡으려 했지만 소녀가 인형인 나를 추월해 나가다니, 저 녀석 유령이다 싶었다. 저기다! 유령소녀인데 좀 잡아요 하며 죽어라고 뛰자니 어디선가 방울소리가 들린다. 뛸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방울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가보니 갑자기 나타나는 방울이 달린 초록색 그물망과 어디에서 어린애 칭얼대는 소리와 함께 이거 놓으라고 그물은 무례하다고 그리고 왜 이렇게 넓은 곳에서 장난도 못치게 하냐고 자긴 유령이니까 사람이나 인형에게 씌일 수 있으니까 무서워하라고 버둥거리는 그물에 잡힌 소복의 소녀와 농장장님?
농장장이 네 몫이라며 당밀 한 봉지를 주니 조용해져서는 뽀옹하고 사라진 소녀와 함께 밭이 절단난 사건은 경찰 없이 마무리됐다. 농장장님, 어찌 된 일이죠? 농장장은 유령소녀가 로프에 매단 낫으로 밭 한 귀퉁이를 절단냈는데도 걔 요기 자주 오는 애야 하면서 뭔 일이 났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농사 망치고 해고당한 뒤에 다른 곳에서 일자리도 못 구하려면 퇴마하라고 하던데 어이가 없어서. 짜증이 날 정도의 황당한 말이었지만 뭐, 저 녀석이 여기에 비도 내리게 하고 벌레가 못 오게 벌레 한정의 저주를 걸거나 해서 여기가 이렇게 무농약 설탕을 만든다고요? 자네는 인형이라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걔가 밭을 절단낸다는 것은 이번 농사가 손해는 아니라는 그런 이상한 소리만 듣다보니 정신이 어떻게 될 것 같았지만 뭐, 다음 날부터 정상 퇴근했다. 이런 일로 소동을 부려서 설탕 생산에 지장을 주지 말라는 의미와 사건을 좀 잊으라는 차원에서 며칠 간 자율근무 하라며 아르바이트를 좀 모아야 겠다하는 농장장이 가고 나서도 나는 그저 넋이 나간 모양으로 절단난 한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퇴근을 하고 내 오두막으로 돌아오자 나는 놀랐다. 나에게 묘한 자동인형이라며 당밀 한 봉지를 씹고 있는 농장 절단낸 유령소녀가 들고양이 녀석의 견제를 받으며 내 집 한 구석에 있었기 때문이다. 웃으며 서서히 사라졌기에 한 대 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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