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은 아름답다. 다만 그것 뿐이라서 슬플 뿐이다. 오늘도 정원을 가꾸고 온실을 돌보고 숲을 산책하며 열매를 모으고 물가에서 마실 물을 길어왔다. 그리고 아이와 요정, 동물들과 함께 폭신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불을 지펴놓은 채로 내리는 바람에 철길을 따라 혼자서 내달리는 증기기관차를 붙잡아서 차고까지 몰고가며 철길 위로 놓인 전깃줄이 아직 팽팽한가 살펴보기도 했다. 그렇게 섬은 빛났다. 다만 그것 뿐이었다. 계속 그 뿐이라고 이야기하며 차고에 도착했을 즈음에 나는 피곤해져서 잠시 근처 풀밭에 누웠어. 그리고 예전 기억이 한데 뒤섞인 악몽을 꾸었다. 이 섬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사람들이 하유라는 섬나라로 갈 때, 나도 그 안에 있었지만 의외로 사람들과 같이 살기 싫었던 나머지, 나만 통나무 배를 타고..
귀여운 자동인형 소년. 온실 속에 살아요. 세상을 잘 몰라요. 세상이 무서워요. 지쳐서 쓰러지면 여우가 폭신해. 목 마를 때면 샘이 눈 앞에. 우울하지만 반짝이는 세상 속 왕자님같은 인형은 어느새 세상 밖으로 끄집혀졌어요. 보통의 못생긴 아이로 현실을 살면 이렇게 형편없어지던가요. 조금 더 걸어가면 죽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오늘도 현실 속에서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어떤 온실 속 귀여운 자동인형 소년이 있었어요. 죽어서 다시 자신의 온실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게 행복.
말해줘요. 나는 지금 잠들어 있죠? 어딘가에 잠들어서 무언가에 연결되어 환상이 계속 넣어지는 채로 잠들어 있는게 분명해요. 포트넘 가설이었던가요, 통 속의 뇌보다는 온전한 모습으로 어딘가 붙잡혀서 연결되어서는 환상이 불어넣어지는 것 같은데요. 하나의 허상이 있고 그 허상을 붙잡아서 그것을 어떤 실체로 알아버리는 순간, 시뮬라크르는 시뮬라시옹으로. 결국 가짜잖아요. 이 모든 아름다움 추악함 불평과 호평과 호감과 혐오 그리고 접하는 현실과 꿈과 그 모든 것들이 어떤 기계로부터, 어떤 매체로부터 우리한테 주입되잖아요. 당장 나를 구해주세요. 형태가 없어졌다면 저를 죽여주세요.
나를 저며서 드릴게요. 맛있게 드세요. 또 드릴까요? 나는 쓸모없어요. 그러니 요리되면 더 나을까요. 어떤 향이 좋을까요. 타임 로즈메리 라벤더 민트 용기 나를 기억해요 침묵 다시 한 번 사랑하고 싶습니다 아무것도 내 안식이 되지 못해요. 그나저나 내가 나를 저미고 있군요. 나를 승계하는 자동인형인가요. 하지만 나는 지금 차악해서 무서워. 그런 경우여도 나는 죽은 원래의 나를 저며요. 환상을 보며 나는 요리되었어요. 무슨 환상이었을까; 어울리면서 처형당하는 그런 환상; 사람들에게 끝도 없이 배신당하는 환상; 친절했던 사람이 나에게 등을 돌리는 환상. 맞아요. 현실은 환상, 환상이 현실. 나에게는 적어도 아무것도 없으니.
누가 대화다운 대화의 형식을 제게 알려주었으면 해요. 저는 대화다운 대화를 못하고 있고 그게 뭔지도 몰라서 사람들한테 진짜 말하는 법을 모른다고 한소리 듣는데 도대체 대화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람보다는 인형에 가까운 저는 사람을 어떻게 알아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저도 사람된 이상, 외람되지만 알아야 해서 말이에요. 사회성 떨어진다고, 아는 것만 많고 생각만 많고 다른 것은 다 안됐다고 듣기는 더 이상 싫어. 비유를 들면 대부분 못 알아듣더라고요. 그리고 어려운 이야기라면 테세우스의 배라던가 거짓말쟁이 크레타인같은 얘기를 말하나요? 그리고 평범한 일상은 무엇이고 관심사가 같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어요? 그리고 사람은 어떻게 다른 사람과 친구가 되는거죠? 사회성이 떨어..
향기로운 차를 준비해 놨고 달콤한 과자도 준비했어요. 알아차리고 와주세요, 병든 심리의 가시덤불과 알 수 없는 명제의 숲 너머로. 숲 속, 답이 존재할 리 없는 딜레마를 헤치고서요. 여기, 내가 준비한 것들은 당신을 위한 것. 하지만 당신은 주머니칼로 나를 죽이려들고 나는 알아버리죠. 나는 있으면 안 돼. 남에게 폐만 끼치는 멍청이잖아. 그러면서 가시덤불이나 딜레마 명제의 숲을 얘기하면 나는 모를 수밖에 없어요. 나는 여기에서 줄곧 있었으니까요. 숲 속이나 숲을 가로질러 있는 곳은 모르니까 가르쳐달라고 순진하게 웃으면 목을 긋고 목을 긋고도 피가 흐르지 않아 몇 번이고 찌르고 그렇게 귀엽고 하얀 모습이 망가져버리면 그것이 매우 달콤한 악몽이겠죠. 후회하기 시작한다면 나는 이미 망가져있어요. 애초에 망가져..
눈을 뜨면 나는 정원에 있었다. 아무래도 나의 꿈이라는 것은 생각해봤자 건강해지지 않는 느낌이 나지만 여하튼 이곳은 꿈과도 같았다. 정원을 걸으며 상쾌한 향이 나는 박하와 진정하게 해주는 향의 라벤더, 특이한 향의 백리향이 바람에 흔들려서 향기로웠다. 저 너머에서 새하얀 아이가 손을 흔들며 나를 반긴다. 만나서 반가워. 오늘은 날씨가 좋네라고 인사를 나누면서 서로를 상냥하게 대해준다. 섬에는 봄과 가을 밖에 찾아오지 않아서 춥지도 덥지도 않고 이 섬에 사는 사람은 나, 단 하나. 나머지는 숲 속의 순한 동물들과 착한 요정, 그리고 내 마음을 깃들인 새하얀 자동인형들. 그렇게 모두가 여기의 다정함에 조금씩 물들어가며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는 생각을 만들어나갔다. 결국 아무도 없는, 아름다운 곳이라서 조금 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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